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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시선

“축하합니다, 국회의원에 당“첨!”되셨습니다.”

2040년,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김 아무개 씨의 가상일기.


“축하합니다, 국회의원에 당“첨!”되셨습니다.”


어제 추첨관리위원회에서 받은 통보다. 5-6년 전쯤엔가, 고등학교 동창 녀석 하나가 추첨에 뽑혀 3년 동안 국회의원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0.001% 확률에 들다니 참 재수 좋은 녀석일세,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 국회의원 추첨에는 내가 그렇게 된 셈이다. 국회의원이 되면 일단 보통 사람이 버는 소득보다 많은 돈을 월급으로 받게 되니, 남 얘기일 때야 재수 좋다, 부럽다, 생각했지만, 정작 내 일이 되고 보니 간단치는 않다. 일단 직장도 잠시 쉬어야 한다. 물론 법규상 회사는 내 휴직계를 받아줘야 하고, 복직했을 때 의정 활동을 경력으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도 3년을 현직에서 떠나 새로운 일을 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약간 복잡해진다. 생판 모르는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섞여 의정 활동을 하는 것, 괜찮을까? 하긴 좋은 기회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국회의원 추첨제가 도입된 지도 어언 20년, 추첨으로 국회의원에 뽑혀 의정 활동을 펼친 사람이 1만 명 가까이다. 미디어를 통해 보면, 다들 국회의원으로서의 경험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는 건 기본이고 “인생이 달라졌다.”고까지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의정 활동 시작하기 전에 받는 석 달간의 교육 덕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국가 운영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입을 모은다. 국회의원으로서 수행해야 할 업무에 대한 상세한 교육뿐 아니라, 헌법에서 규정하는 민주주의 절차, 행정부 각 부처의 업무 범위와 협업 과정에 대해서까지 꽤나 철저한 교육을 받는 모양이었다. 정 마음이 내키지 않고 지금의 일을 쉬고 싶지 않으면 거절할 수도 있겠지만, 0.001%의 확률 아닌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행운일지도 모른다.


2010년 전후로 추첨으로 국회의원을 뽑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공상이라는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오히려 역사를 더 거슬러가면, 민주주의의 원형으로 불리는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평의회, 시민법정, 행정관 등의 주요 국가기관에 추첨제가 널리 쓰였고, 2010년경에도 사법 부문에서는 배심제라는 추첨 민주주의적 제도를 도입한 나라가 많았는데, 왜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이라고들 생각했을까? 국민 일반이 사법적 판단은 내릴 수 있어도, 입법적 판단은 내릴 수 없다는 생각이었던 걸까? “보통”의 국민 중 일부를 무작위로 뽑아 국회에 모아두면 국회로서의 입법 기능, 예산 심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하고 질문이라도 던져주면 다행이었다고 하니, 지금으로서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국회의 꼬락서니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자, 그제야 사람들이 “아니 우리가 저들보다 못할 게 뭐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가 멀다고 의원들이 이권을 두고 돈을 받아먹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날치기로 예산안을 통과하는 게 일상이 되고, 회기 막바지에 수십 건의 법안이 한꺼번에 처리되어 버리는 일이 거듭하자, “대체 우리가 저들보다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있었고 혼란도 따랐다. 무작위로 뽑힌 국회의원 500명이 모두 성실하게 의정 활동을 펼친 것도 아니다. 추첨제가 시작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성실한 국회의원은 있다. 그러나 선거로 국회의원을 뽑던 시절보다 심한 건 아니다. 적어도 국회의원들이 의정 활동보다 정파 싸움에 골몰하고 지역구 돌보는 데 혈안인 꼴은 보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국회가 거의 정확히 국민의 구성을 반영하게 되자, 정말 다양한 사안이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매번 조금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의원 절반이 여성이고 장애인 의원도 500명 중 25명 남짓 된다. 가장 흔한 사람들이 자영업자로 일하던 사람, 일반 회사 다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법안 발의에 문제가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전문가로 구성된 각종 자문위원회와 보좌진, 행정부 공무원들이 전문성을 보완해준다. 사실 핵심은 전문 지식이 아니고 관심사다. 무작위로 추첨된 의원들이니 당연히 국민의 일반적 구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고로 관심사도 그만큼 다양하다. 속속들이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그러한 문제제기에 전문가들이 답변하고 조언한다. 그런 답변과 조언을 바탕으로 한 심의 과정을 거쳐 의원들은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다. 민간주도의 법안 발의가 가능해지면서 추첨제가 실시되기 전보다 발의 법안 수도 오히려 늘었다. 예전에는 선거구나 정치자금법, 의원 정수, 선거 제도 등 의원들 본인의 이해관계에 직결하는 법까지 국회의원들이 만들었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정경유착과 부패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따금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 빈도와 규모가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정치인이 직업이고 십수 년간 국회의원을 지내며 세를 쌓은 사람이 사라지자, 기업이 로비를 펼치려 해도 그 대상이 마땅치 않아졌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사람을 특정할 수도 없는 데다가, 현재 국회의원이라 해도 3년 임기가 끝나고 나면 영향력을 모두 잃을 사람인지라 “관계에 투자”한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더구나 국회의원으로 추첨된 사람의 성향이 어떤지 알기 어려운 상황에서 무작정 “접근”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일이다. 섣불리 돈 봉투를 들이밀었다가 화근이 생길 수 있으니, 애초에 그런 시도 자체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비리 사건이 터진다 해도 일회적인 사안에 대한 적은 규모의 뇌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지금도 선거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대통령은 여전히 선거로 뽑고, 주요 지자체장 및 몇몇 중요한 공직자도 선거를 통해 선출된다. 그렇지만 “민주주의 = 선거와 투표”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2010년 전후만 해도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느니, 투표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표출하라느니, 했다는데,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선거에 후보로 나서려면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었다고 한다. 금권선거를 없애겠다고 그렇게 오래 애썼다지만, 불법적으로든 합법적으로든 선거 자금 모으는 게 정치인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피선거권의 평등이란 말뿐인 소리였다. 어쩌다 한 번 있는 투표가 국민이 참여하는 유일한 정치 활동이었고, 결국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점점 잃어갔다. 누굴 뽑아봤자 별로 다를 것 없다는 회의도 팽배했다. 결국 투표율은 겨우 50% 될까 말까한 지경이었다. 그런 선거에서 4-50% 득표해봤자 전 국민 20-25%의 지지를 받는 셈인데, 그 정도 지지로도 한 정당이 의회를 장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의회가 민주적 산물이라고 믿었다니, 지금으로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뽑힌 국회의원들이 “선택된” 사람이랍시고 어깨에 힘이나 주고 다니며 권력자 행세를 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2012년의 국회의원 구성을 보면, 여성은 고작 15.7%, 장애인은 1.3%, 그에 반해 서울대 출신은 20.7%, 50대 이상은 무려 67.0%였단다. 아니, 저렇게 일반 국민과 동떨어진 구성의 국회가 국민 전체를 대의한다고 생각했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엘리트주의같이 보이는 데 말이다. 하긴 그보다 더 거슬러가면 여자에겐 아예 투표권도 안 주던 나라도 있고, 사람을 노예로 사고팔기도 했었다니, 원래 역사란 게 그런 거겠지.


사나흘 더 생각해보고 추첨관리위원회에 최종 통보를 보내야겠다. 아마도 3년간의 국회의원 경험을 결국 선택하게 되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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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추첨 민주주의가 구현된 미래에 대한 거친 스케치다. 물론 추첨으로 뽑은 국회의원이 현재의 국회를 완전히 대체하는 식으로 추첨 민주주의가 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추첨 민주주의를 대안으로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정교하고 상세한 추첨 민주주의의 모델을 고안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를 접하면, 추첨 민주주의가 전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더구나,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추첨 및 심의 민주주의의 성격을 띤 제도가 여러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선거와 동의어가 아니다. 말 그대로 선거의 해인 2012년, 정치에 또 한 번 실망하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투표함에만 가두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거침없는 상상은 의미 있는 작은 변화의 씨앗일 수도 있다.


참고자료>

어니스트 칼렌바크 ․ 마이클 필립스 지음, 손우정 ․ 이지문 옮김, 『추첨 민주주의』, 이매진

이지문 지음, 『추첨 민주주의 이론과 실제』, 이담북스

“[19대 국회의원 300명 분석](2) 당선자 직업·학력, (3) 당선자 성별·연령별”, 한국일보, 2012년 04월 12일


[한겨레 훅에 기고한 글]

http://hook.hani.co.kr/archives/44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