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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각들

이해하지 않고도 지지할 수 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행한 이와만 같은 편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 전, ㅆㅍ 성폭력 피해자분이 자신이 오피스텔에 따라올라갔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철저히 '을'인 위치에 놓여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로 나뉘더라,는 트윗을 올린 것을 보았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대략 저런 의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저 트윗 앞에서 약간 멍한 기분이 들었는데,,


내가 그 피해자를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생각할 때, 그가 오피스텔에 따라간 것을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오피스텔에 따라갔든 따라가지 않았든, 그 상무란 이가 오피스텔에 따라올라올 것을 요구했을 때 이미 가해-피해의 상황은 성립한 것이기에.


어쨌든 저 트윗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생각의 결론은 "나라면"이라는 전제가 무척 부질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철저히 '을'인 위치에 놓여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내가 오피스텔에 따라올라가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만, 

거기서부터 이미 나는 "나라면"이라고 제대로 전제하기 어려우므로, "나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은 그저 부질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지평에 서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처지에 대해서, 그리고 사실 나 아닌 다른 누구의 처지에 대해서도 100% 공감 같은 것은 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강자이고 누가 약자인지 판단할 수 있으며,

무엇이 합당하고 합당하지 않은지 판단할 수 있기에,

피해자의 행위를 이해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피해자와 한편에 서서 그를 지지하고 응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라면"이라는 전제를 깔고 이해를 요구하는 언어는 오히려 지지와 응원의 기반을 더 좁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 '을'의 위치에 놓여본 적 없는 자를 배제하는 언어는 전략적으로는 그리 영리한 언어가 아니라는 생각하는데, 물론 1차 가해자로부터, "나의 이해할 수 없음"을 들이미는 2차 가해자로부터 상처받았을 그의 입장을 생각해보자면, 전략적 유불리와 상관없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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