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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이야기

[소리내어 책 읽기] 힘센 돈의 계열


사람들은 모두 여러 계열 위에서 살아간다.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계열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사는 대관령의 계열은 도시의 계열만을 탑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혈연 공동체의 계열이 있고, 종교의 계열이 있으며, 금융업의 계열이 있고, 농업의 계열이 있다. 몸으로 노동하는 이들의 계열이 있고 펜대를 굴리며 노동하는 이들의 계열이 있다. 하나의 물리적 장소에도 여러 계열이 놓인다. 그 계열은 하나의 가치체계를 포함한다. 한 계열에서 의미 있는 가치가 다른 계열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가장 많은 인간이 좋든 싫든 공유하는 계열이 바로 짐멜이 말하는 돈의 계열일 것이다. 그 추상성이 낮고 수량화의 정도가 작을수록 계열의 범위는 작아지며, 물리적 공존 없이는 공유하기 어려워진다. 추상화되고 수량화된 가치는 쉽게 공유될 수 있지만, 현실의 질감을 지닌 가치의 계열은 물리적 감각을 통해서만 공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여 추상화된 교환 가능성의 대상으로 전환해내는 돈의 계열만큼 많은 사람을 포섭하는 힘센 계열은 없다. 




나의 사물이 돈의 계열로 편입될 때 객체가 지닌 개별적 가치는 소거되는데, 이를 통해 사물의 총체성은 희생되지만 그만큼 돈의 계열이 지닌 총체성은 확대된다. 사물의 총체성이 희생된 덕에 그 어느 것보다 크고 힘이 센 돈의 계열이 탄생했다. 짐멜에게 돈을 통해 실현되는 거대한 통일성의 계열이 인류가 이뤄낸 위대한 진보였다면, 이반 일리치에게 그것은 명백한 퇴보다. 일리치는 교환가치가 아니라 사용가치의 세상에서 개별 인간이 스스로 존엄을 책임지고 자족하며 살던 방식을 되살려내자고 한다. 돈을 통해 이루어낸 엄청난 확장성에서 짐멜이 인류의 유능함을 보았다면, 일리치는 일상 속에서 한없이 무력해진 인간을 본다. 


그러나 짐멜이 그 확장성을 획득하기 위해 인간이 희생해야 했던 것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인은 원시인과 완전히 다르게 노동해야 하며 완전히 다른 강도의 노력을 바쳐야 한다. 왜냐하면 현대인과 그가 의지하는 대상들 사이의 간격은 원시인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크며, 훨씬 더 어려운 조건들이 양자 사이에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가 이념적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통해서 그리고 실제적으로는 자신의 노동 희생을 통해서 획득하는 것의 양은 엄청나게 더 크다. 문화 과정 - 그러니까 충동과 향유의 주관적인 상태를 객체에 대한 가치 평가로 전환하는 과정 - 은 가까움과 멂이라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관계의 요소들을 점점 더 첨예하게 분리한다.” 61쪽, [돈의 철학] 

가깝던 것은 멀어졌으며, 멀던 것은 가까워졌다.  멀던 것에서 인류는 유능해졌으나, 가깝던 것에서 개별 인간은 무력해졌다.


짐멜은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사회집단의 크기와 중요성은 종종 그 개별적인 구성원들의 삶과 이해 관심이 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될수록 더욱더 커진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또한 나는 객관 문화 및 그 실제적인 내용들의 다양성과 생동감은, 이 문화의 개별적인 담지자들과 참여자들을 종종 단조로운 전문성 그리고 편협성과 위축 상태에 가둬버리는 노동 분업을 통해서 그 최고 수준에 도달한다는 점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아무튼 개인들이 조화로운 전체가 아니면 아닐수록 전체는 더욱더 완전하고 조화로워진다.” 311쪽, [돈의 철학]


짐멜의 이 말은 건조하고 차갑지만, 일리치의 뜨거운 말과 공명한다. 


"'현대화된 가난'은 ...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이 신종 가난을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간에 벌어진 소비 격차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6~7쪽,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돈은 진보를 가져왔는가 퇴보를 가져왔는가. 이런 식의 이분법은 아마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돈의 확장성을 통해 이룩해낸 것을 되돌리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다. 다만 돈의 계열에서 밀려나는 개별적 가치들을 어떻게 되살려 또 다른 힘센 계열-들을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우리는 어떤 멀어진 것을 가깝게 하고 싶은가. 

소거된 어떤 개별적 가치에 빛을 비추고 싶은가. 

그리고 그것들의 계열을 어떤 언어로 만들어내고 싶은가


돈의 계열이 어떻게 조직되어 우리 삶의 기반으로 편재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기 전에는 이 질문들을 제대로 물을 수 없을 것이다.




돈의 철학

저자
게오르그 짐멜 지음
출판사
| 2013-10-2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어떤 경제학자도 수행할 수 없는, 더욱이 단순히 경제학적 논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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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저자
이반 일리치 지음
출판사
느린걸음 | 2014-09-1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인간을 무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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