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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각들

화차 - 날 사랑하긴 했니? 그 견딜 수 없이 가벼운 물음.

뒤늦게 <화차>를 봤다.

용산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김민희와 재회한 이선균이 "날 사랑하긴 했니?"라고 물었을 때,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랑이 사랑이려면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 하나의 사랑은 그 사랑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만 유효하다.
첫번째 남편은 김민희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녀를 버렸던 것이 아니다. 빚쟁이의 무시무시한 협박이 자신의 물적 토대를 완전히 파괴하고 일상을 위협했을 때, 이전의 사랑은 더 이상 유효할 수 없었다. 그것을 뼈저리게 실감한 그녀에게, 그리하여 사람답게 살 물적 토대를 얻고자 자신의 실존을 버려야 했던 그녀에게, "날 사랑하긴 했니?"라니... 그 질문이 너무도 가벼워 웃음이 났다. 그녀의 모든 사연을 알고도 자신의 사랑이 버려진 것이 애닳아 "날 사랑하긴 했니?"라고 묻는 남자라니.

아프겠지. 배신감이 들겠지. 그렇지만 그 질문은 너무도 부적절했다.
차라리 난 정말 너를, 아니 너라고 생각했던 그 여자를 사랑했었다, 고 고백했다면 이선균의 아픔에 훨씬 공감이 갔을 뻔 했다.
김민희가 사랑했었노라 답했다면, 이제 허공으로 흩어져버린 토대와 함께 흩어져버린 사랑일진대, 그 사랑으로 무엇을 어찌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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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는 참 좋았다.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고, 다 보고 나서 이런저런 곱씹을 거리도 많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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