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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이야기

신화 깨뜨리기

『만물은 서로 돕는다』세미나 1회차 발제문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 하나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면, 다윈은 “적자생존”이라는 말로,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로 기억됩니다. “적자생존”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말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손”과 함께 근대국가와 시장사회를 떠받치는 또 다른 신화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부터 함께 읽을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의 가장 큰 의미는 이 두 가지 신화가 말 그대로 신화일 뿐임을 드러낸다는 데 있습니다. 

[잠깐 사족으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의 국문 제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뭔가 너무 낭만적인 분위기를 풍긴달까요. 영어 제목인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상호부조: 진화의 요인)이 “상호부조가 상호경쟁보다 진화의 더욱 강력한 요인”이라는 책의 메시지를 훨씬 잘 담아낸다고 생각합니다. 일반 대중서였다면야 시선을 끌려고 제목을 이렇게 바꿔 붙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고전이랄 법한 책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을까 싶습니다.] 


1859년 『종의 기원』의 출간과 함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연을 끊임없는 생존 투쟁이 벌어지는 장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고자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며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적자”가 “선택” 받는 것이 자연법칙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인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에도 그대로 투영됩니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경쟁을 벌이는 것은 원숭이의 후손인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설계는 실패하게 되어 있다고 믿지요.


시간을 더 거슬러 1651년 출간된 『리바이어던』에서 홉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자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으며, 때때로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을 반사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태어난 존재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특히 “폭력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속적으로 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와 같다.”

자연 상태의 인간을 이렇게 바라본다면, 인간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을 멈추기 위한 외부적 권위가 필요해지고, 그리하여 싸울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부터 권위를 위임받는 국가가 탄생하게 됩니다.


홉스와 다윈이 내놓은 것으로 알려진 이런 견해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을 활용하여 생산력을 확대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시장사회의 근본 철학, “국가 권력이 없다면 인간 사회는 투쟁으로 가득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는 근대국가의 근본 철학을 형성합니다. 크로포트킨은 이 책에서 이 두 가지 근본 철학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자연 상태의 인간(동물)은 투쟁을 일삼는가?” “생존경쟁이 진정 진화의 추동력인가?”



크로포트킨이 책을 시작하면서 밝히고 있듯이, 다윈이 내건 생존경쟁은 “서로 다른 개체들 사이에 벌어지는 생존 수단 획득 투쟁”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다윈은 『종의 기원』의 서두에서 생존경쟁이 “존재의 상호의존, 그리고 그 개체만의 생명뿐 아니라 번식”까지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호의존”을 포괄한다고 이야기했다는 데 주목합시다. 물론 자연 상태에서의 삶에 투쟁적인 측면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삶은 투쟁이며, 그 투쟁에서 적응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다윈이 주창한 바인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투쟁은 개체와 개체 간에 벌어지는 경쟁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윈이 삶을 투쟁이라고 표현할 때, 투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포식자인 다른 종이거나 혹독한 자연환경 일반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동물 대부분이 자연 상태에서 상시적인 굶주림으로 고통받았으며, 따라서 먹이를 얻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에 따르면, 이런 생각은 입증된 바가 없습니다. 평상 상태에서 개체 수는 대부분 자연이 포용할 수 있는 한계치 이하로 머뭅니다. 물론 국지적으로 개체 수가 포화상태에 근접할 수는 있지만, 그 경우 한곳에서 머물며 개체 간에 경쟁을 벌이는 것보다는 이동을 통해 새로운 지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동물들의 일반적인 선택입니다. 실제로 개체가 노화 이외의 이유로 사망한다면, 대부분 경쟁에서 밀려나 먹이를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급작스러운 환경 변화나 혹독한 질병과 맞닥뜨려서입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자연 상태에서 벌어지는 투쟁은 대부분 동물 개체 간의 투쟁이 아니라 혹독한 환경과의 투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투쟁에서 살아남는 “적자”가 되게 해주는 것은 같은 종 내의 상호부조일 가능성이 큽니다. 크로포트킨은 “그[다윈]가 암시한 바로는, 이러한 경우에 가장 적응을 잘한 종들은 육체적으로 가장 강하거나 제일 교활한 종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강하든 약하든 동등하게 서로 도움을 주며 합칠 줄 아는 종들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과 2장에 걸쳐, 상호부조를 실천하며 섬세하게 구성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다양한 사례를 소개합니다. 특히 종의 수가 천 개를 넘을 뿐 아니라 개체 수도 어마어마한 개미가 보여주는 상호부조의 모습은 경이로운 수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여겨볼 점은 상호부조의 한 축이 도움이라면 또 다른 한 축은 응징이라는 사실입니다. 개미 두 마리가 마주쳤을 때, 둘 중 하나가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다면 상대방에게 즉각 먹이를 요청하며, 상대는 그 요청을 거절하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 먹이를 충분히 먹었는데도 동료에게 나누어주기를 거절하는 개미가 있다면, 그 개미는 무리로부터 적이나 다름없는, 심지어 적보다 더 나쁜 취급을 받게 됩니다. 도움을 거절했을 때의 “응징”은 개미의 무리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이 아닙니다.



크로포트킨은 3장에서부터 인간에게로 시선을 옮깁니다. 홉스 식으로 생각하면, 자연 상태의 야만인에게는 끊임없는 상호투쟁이 발견되어야 하고, 소위 “사회계약”이 등장하고 나서야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이 보여주는 실상은 이와는 사뭇 다릅니다. 초기의 인류는 씨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여 상호부조를 실천했습니다. 부시맨부터, 호텐토트족, 오스타크족, 사모예드족, 에스키모족, 다야크족, 알류트족, 파푸아족, 퉁그스족, 추크치족, 수우족 등의 수많은 미개종족은 모두 함께 먹을 것을 구하여 나누어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들 야만인의 삶에서도 개미의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도움”과 “응징”이 공동체를 지탱해주는 축으로 기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만인의 “야만적” 관습으로 여겨지는 식인 풍습이나 유아 · 노인 살해 등도 처절한 생존투쟁의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적 가치의 선상이라고 크로포트킨은 지적합니다. 야만인의 생활 풍습을 그들이 처한 삶의 맥락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면, 사회계약으로 해결해야 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무한경쟁이야말로 그에 더 들어맞는 모습이 아닐까요? 

야만인의 특성은 오히려 철저한 집단성에 있습니다. 그것을 낭만적으로 미화할 필요는 없겠지만, 야만인이 원래 처절한 야수성을 지녔으며 문명화를 통해 그런 야수성이 사라졌다는 생각은 사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야만인의 특성은 “개인이라는 감각의 부재”에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종족의 존재와 동일시”했으며, 이러한 특성이 없었다면 인류는 자연과의 처절한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끊임없는 진화의 연쇄에서 살아남은 다른 모든 동물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야만인의 씨족 공동체는 약 2000년 전 벌어진 대이동으로 무너집니다. 대이동은 자연스럽게 부족의 분산을 가져왔고, 이는 혈족관계를 기반으로 한 씨족 공동체를 허물어뜨렸습니다. 대부분의 종족들은 이 과정에서 사라져버렸지만, 여기서 살아남은 종족들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바로 “공동의 노력을 통해 전유되고 보호되는 공동 영토”를 중심으로 구축되는 촌락 공동체입니다. 유럽 대륙의 스킨디나비아인, 슬라브인, 핀란드인, 쿠르인, 리브인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지구 전역에 걸쳐 촌락 공동체가 발견됩니다. 촌락 공동체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경작했다는 점입니다. 촌락 공동체에서 토지의 사적 소유는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이나 한 가족이 땅을 영구히 배타적으로 소유한다는 개념은 로마법과 기독교 교회의 영향을 오랫동안 받은 후에야 촌락 공동체 안에 자리 잡았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때에조차 모든 토지가 사적인 소유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둘째, 공동체 안에서 이뤄지는 사법적 · 군사적 · 교육적 · 경제적 의사결정이 민회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민회는 의회와는 달리, 대표자들이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성인 남성)으로 이뤄지는 조직입니다. 공동체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민회는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제를 중심으로 의사결정이 내려졌고, 합의에 이를 때까지 토론과 협의의 과정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촌락 공동체는 씨족 공동체의 바탕이 되었던 상호부조 본능에 똑같이 뿌리 내리고 있으면서도, 섬세하게 발전된 제도들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경제 · 사회생활을 꾸려갔습니다. 사적 소유가 도입된 후에도(이 경우에도 토지에 대한 전면적 사적 소유가 허용된 것은 아닙니다.) 가난을 개인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해결해야 할 사건, 외부적인 요인으로 빚어진 불운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카바일족의 사례가 특히 눈에 띄는데, 카바일족은 “가깝게 함께 살며 어떻게 빈곤이 시작되는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가난을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수 있는 일종의 사고로 여겼다”고 합니다. 부랴트족의 경우는 “만일 어느 가족이 가축을 잃게 되면 만회할 수 있도록 부유한 가족들이 젖소나 말을 약간씩 주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들에서 촌락 공동체가 나름의 사회 안전망 또는 사회 보험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함께 소유한 땅에서 함께 노동한다는 공동체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런 촌락 공동체의 모습이 바로 홉스가 말한 사회계약이 구현된 모습이라고 이야기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연 상태의 인간이 촌락 공동체를 이룬 인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어떤 “단절”이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촌락 공동체에서 고도로 제도화된 상호부조의 정신은 그 이전의 인류로 거슬러 올라가도 똑같이 발견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실제로 홉스의 사상을 좀 더 들여다보면,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란 시민사회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자 하나의 논리적 가설에 불과합니다. 홉스는 실제로 『법의 기초』에서 인간의 사회성과 상호의존성을 인정했으며, 자비 · 선의 · 자선을 인간이 지닌 “다른 사람에게 좋게 하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잠깐 언급했듯이 다윈의 “생존경쟁”이라는 말은 먹이를 두고 벌이는 개체 간의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고, “적자생존”이라는 말 역시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홉스나 다윈 모두,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이데올로기 안에 박제되었듯이, 위대한 사상가였던 죄로 마찬가지 운명을 겪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복잡하고도 섬세한 복합체였을 이들의 사상이 한마디의 말로 박제가 되어버릴 때, 그 한마디 말은 언제나 집중화된 권력에 복속했다는 것이 우연은 아니겠지요?


그 집중화된 권력의 등장 아래, 대부분의 동물과 마찬가지로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이 타고난 인간은 그제야 “생존경쟁”의 물결로 휩쓸려 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물결 속에서도 오히려 상호부조의 본능을 애써 붙들고 있었음을 우리는 여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음 세미나에서 살펴보게 될 내용입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저자
P. A. 크로포트킨 지음
출판사
르네상스 | 2005-04-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다윈의 '생존경쟁'과 대위 선율로 울리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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