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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이야기

"자유"로워지니 좋습디까

『만물은 서로 돕는다』 7-8장(마지막) 세미나


지난 시간에는 15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벌어진 중앙집권적 국가와 자생적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다루었습니다. 자생적 공동체는 끝까지 분투하였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결국 이 갈등에서 승리를 거둔 쪽은 국가였습니다. 3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의 국가들은 상호부조의 전통에 뿌리 내린 제도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공동체의 공유지를 사유화한 ‘울타리치기’였죠. 공동체의 재산 기반만을 무력화하는 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촌락 공동체는 민회와 자치법정과 같은 독립적 경영권을 몰수당했고, 길드 역시 마찬가지 운명을 겪었습니다. 국가는 대학이나 교회와 같은 교육 시스템을 통해 상호부조의 전통에 연합주의나 지역주의와 같은 딱지를 붙이고, 진보의 적이라며 내몰았습니다. 이 과정에 대한 크로포트킨의 일갈이 눈길을 끕니다.


경제적인 법칙에 의해 촌락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고 말한다면 전쟁터에서 학살당한 병사들이 자연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는 농담이다. _280쪽


자신의 몸으로 직접 소속감을 체득할 수 있을 만큼 일상에 밀착한 공동체들이 사라지자, 모든 인간은 개인화의 나락으로 내몰렸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해방이 근대의 기치였지만, 그 자유란 삶에서 누리는 모든 행운을 독차지하는 대신, 부딪히는 모든 불운 역시 혼자 감당해야 하는 운명을 일컫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액체근대』에서 근대에 몰아친 개인화의 흐름을 아래와 같이 설명합니다.


'개인화'는 '주어진' 것으로서의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이를 하나의 '과제'로 삼아 그 과제를 수행할 책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부작용을 포함해)을 행위자에게 지우는 것이다. _53쪽 『액체근대』 


공동체가 수행했던 사회적 기능을 국가가 모두 제거해버렸으니, 혼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짐을 떠맡은 사람들이 “시민”의 이름을 내려놓고 “개인”이 되기를 선택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시민들이 서로에 대해 지던 의무는 사라지고, 국가에 대한 의무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맺던 관계는 끊어지고, 국가의 매개가 직접적인 관계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공동체 내에서 누군가 자연재해로 재산을 모조리 잃으면, 공동체에 소속된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일부 헐어 불운을 겪은 이를 도왔습니다. 이제 개인은 재산이나 소득의 일부를 헐어 국가에 “세금”을 내는 덕에 옆집의 불우한 이웃을 도와야 하는 의무를 면제 받습니다. 자신의 세금이 그런 이들을 돕는 데 쓰일 것이라 막연히 기대하며, 이제 도움을 받지 못한 이들 앞에서 국가만을 손가락질하면 그만입니다. 동전의 반대편을 뒤집어 보면, 실제로 “세금”의 도움을 받아 불운을 헤쳐나간 이가 있다 해도, 그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뿌듯함을 느낄 기회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세금”이란 늘 빼앗기는 돈이요, 줄이면 줄일수록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그리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국가가 하라는 대로 세금만 다 냈다면, 이제 나에겐 온전한 자유가 남습니다. 내 개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내 개인의 안위를 지켜낼 자유입니다. 그 자유에 열심만이 덧붙여진다면, 모든 불운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은 자연스레 따라다니는 짝패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국가의 맹공 아래, 모든 공동체가 절멸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중 눈을 끄는 것이 스위스입니다. 스위스는 지금까지도 공유지의 전통이 살아 있어, 엘리너 오스트롬의 공유지 연구에 중요한 사례로 꼽히기도 했지요. 크로포트킨이 책을 썼던 당시까지만 해도 알프스 목초지의 3분의 1, 스위스 삼림의 3분의 2가 여전히 공유지로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공유지와 함께 상호부조에 뿌리 내린 습속과 제도 역시 면면을 이어왔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스위스가 직접민주주의에 가장 가까운 형태의 정치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겁니다. 스위스는 중요한 정부의 의사결정 거의 모두를 국민 투표를 통해 비준하며, 그 결과 세계 전체에서 시행되는 국민 투표의 절반 이상이 스위스에서 일어납니다.(물론 이런 식이 무조건 좋기만 한 일은 아닐 테지만, 오늘 논의의 핵심은 아니니 넘어가도록 하죠.)


정도는 다르다 해도, 스위스만이 유일한 예외는 아닙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 독일, 덴마크 등지의 마을에서도 공유지를 운영하여, 거기서 나오는 소득을 공동체가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러한 부가적인 공급원을 통해서 가난한 농민들은 흉년이 들어도 자신들의 소규모 필지를 내놓거나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지지 않고도 견뎌낼 수 있기 때문에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300만에 가까운 소작농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부가적인 자원이 없었다면 소농의 소유권이 유지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_286쪽


저는 이 대목에서 "기본소득"을 떠올렸습니다. 오늘날 기본소득이 있다면, 이렇게 바꾸어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기본소득을 통해서 가난한 서민들은 일자리를 잃어도 전세 자금을 담보로 대출을 얻거나 한푼한푼 애써 부어 온 연금보험을 깨지 않아도 견뎌낼 수 있다."


공유의 제도, 상호부조의 전통은 현대 산업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형태로 부활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서로 돕지 않고서는 자본의 도전에 맞설 수 없던 노동자들은 과거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자연의 도전에 맞설 수 없던 야만인/미개인과 마찬가지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노동자/서민 계층의 대표적인 공동체가 바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입니다. 


그밖에도 각종 공제회와 친목 단체들 역시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직접 관계를 맺어 인생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공통의 관심사”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의 촌락 공동체와 같이 삶 전반을 나누는 수준이 아니라 하더라도, 생산이나 소비와 같은 경제 활동이건, 단순한 유희나 오락이건, 무언가 관심사를 공유하여 관계를 “직접” 맺는다는 것만으로 상호부조의 출발점이 됩니다.


인간은 물려받은 본능과 받은 교육의 산물이다. 광부나 어부들 사이에서 이들은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서로 간의 일상적인 접촉을 통해 연대감이 생겨났다. 이들을 둘러싼 위험한 환경도 용기와 담력을 유지하게 해준다. 반대로 도시에서는 공통되는 관심사가 없기 때문에 무관심하게 되고 용기나 담력도 발휘해볼 기회가 거의 없으므로 사라져 버리거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_323쪽


그러나 애석하게도, 크로포트킨이 이 책을 쓴 1914년 후로 100년 간 상황은 이런 상호부조의 전통을 더욱 되살려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서민과 노동자에게 세상은 점점 가혹해졌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빈곤 퇴치는 이제 시간문제처럼 보일 정도의 황금기가 찾아왔지만, 그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그리고 그 기간이 역사상 노동조합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을 때라는 것 역시 우연은 아닐 겁니다.) 신자유주의의 포화 아래, 사람들은 더욱 극단적인 개인화의 물결에 휩쓸렸고, 개인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은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적자생존”의 시장에 내던져졌습니다. 이제 그 개인들의 손에 들린 것은 근대가 선물했던 바로 그 찬란한 “자유”입니다만, “자본”이 가진 “자유”에 비해 우리 손에 들린 “자유”는 어째 빛 좋은 개살구 같지 않은가요.





만물은 서로 돕는다

저자
P. A. 크로포트킨 지음
출판사
르네상스 | 2005-04-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다윈의 '생존경쟁'과 대위 선율로 울리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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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 2009-06-08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마르크스가 '모든 견고한 것들이 녹아 사라진다'고 말했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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