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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이야기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 발제문



폴라니는 경제적economic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형식적formal, 다른 하나는 실체적substantive 의미입니다.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의 용어를 쓰자면, 전자는 돈벌이 경제이고 후자는 살림/살이 경제인 셈이죠.


실체적 경제는, 폴라니의 정의를 빌리자면,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벌어지는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의 제도화된 상호작용입니다. 하나 짚어둘 것은 『살림/살이 경제학을 위하여』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여기서의 물질적 욕구는 순전히 육체적으로 필요한 것만을 일컫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폴라니는 “욕구가 아니라 수단이 물질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며 “인간의 욕구가 충족을 위해 물질적 대상에 의존하는 한 나타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각주:1]


형식적 경제는 희소성이라는 불가피한 현실 앞에서 선택을 돕는 수단으로서 출발했습니다. 여기에 모든 물질적 수단을 하나의 기준 아래 수량화하는 화폐 제도가 더해지면서, 실체적 경제와의 경계가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형식적 경제 아래서의 경제는 “일과 생산, 기술, 물건을 만들고 소비하는 일이 아니라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곳에서 다양한 방식과 여러 동기를 가지고 경제적 행위에 참여하고 있는 노동자, 자본가 그리고 지주계급들은 결코 경제시스템(체계)에 머물지도 못하고, 대신에 경제는 개별적으로 이윤극대화를 기도하는 무형질의 의사결정자들에 의해서만 존재영역을 확보할 뿐”이지요[각주:2]다양한 인간이 균질화되고 원자화된 인간으로 취급되었으니, 다양한 인간의 욕구가 화폐화된 산출물을 최대화하려는 욕구로 환원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결국 선택을 위한 분석에 깔려 있던 가정은 그 자체가 인간 행동을 이끌고 평가하는 규범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지점에서 바로 소위 “경제주의 오류”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계산상의 합리성, 즉 형식적 경제 아래의 합리성을 유일한 합리성으로 취급하는 것, 바꿔 말해, 형식주의 아래 좋다는 것을 증명한 뒤 그것이 실체적으로도 좋은 것이라고 결론짓는 일이 바로 경제주의 오류입니다. 폴라니는 경제주의 오류를 “추상적 모델과 현실을 동일시하는 것이며, 특히 형식적, 극대화 모델의 자명한 원리와 일치되어야만 경험적 경제행위로 인정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각주:3]


기업의 경제활동을 예로 들어볼까요. 기업은 재무제표의 세계에서 움직입니다. 재무제표란 “실체적” 경제활동을 분석하여 “경제적” 선택을 내리려고 만들어진 하나의 “형식적” 수단입니다. 회계연도 동안 벌어진 경제적 활동이 담기는 손익계산서 안에서 그 활동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유일한 기준은 바로 순이익입니다. 그렇게 단순화된 분석과 평가를 위해 기업이 생산과 판매를 위해 벌이는 모든 활동은 비용으로 취급받습니다. 노동자가 집에 가져가는 수입도, 제품을 만드는 데 쓰이는 재료에 치르는 값도 모두 비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그 순간부터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는 그 모든 비용을 최소화하여 ‘손익계산서의 맨 마지막 줄을 최대화하는 행위’와 동의어가 됩니다. 따라서 노동자의 몫을 좀 더 늘린다거나, 재료를 제공하는 공급업자의 처지를 배려하여 값을 더 쳐준다거나 하는 행위는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요, 순진한 행위로 폄하되지요. “기업은 기업으로서 일단 이윤을 극대화하고, 좋은 일을 하려거든 그 이윤을 가지고 베풀어라”는 논리가 등장하는 지점입니다. 생산하고 분배하는 행위 속에 묻어 들어 있던 상호부조와 호혜의 행위가 경제로부터 분리되어, 공공기구나 비영리기구가 따로 맡아 처리해야 할 일이 되고 맙니다. “비경제적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수단으로 등장한 재무제표는 기업 규범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자리 잡았습니다. 어떤 가치가 있건, 비용을 늘리는 모든 활동은 잠재적/간접적이나마 매출 상승, 이익 증대 효과가 있음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그냥 좋은” 일, “다른 가치가 있는” 일 같은 것은 기업 세계에서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형식적 경제는 실체적 경제를 잡아 먹어버렸습니다. 경제학적 분석을 위해 가정되었던 ‘경제적 인간 -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의 규범 모델이 되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협동조합이라는 모델을 향한 의심스러운 눈초리, “기업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야”라는 평가에 바로 이런 경제주의 오류가 깔려 있습니다. 올 상반기에 함께 읽었던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에서 바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요. 다들 기억이 가물가물하실 테니 아래에 옮겨보겠습니다.


정태적인 효율성을 자본주의 기업과 협동조합의 상대적 성과를 측정하는 유일한 잣대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효율성은 학술 용어로서 기술적descriptive이지 않고 규범적prescriptive/normative이다. 공리주의에서 효율성 개념이 도출되었기 때문인데, 공리주의는 분명히 경제적 원칙이 아니라 윤리적 원칙이다. (...) 두 번째 이유는 분명히 이상주의적 동기를 감안하는 것이 여러모로 협동조합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다만, 두 가지 형태의 기업[협동조합과 일반 주식회사를 일컫습니다 - 필자]에 대한 표준 비교 분석에서는 이러한 이점들이 결코 나타나지 않는데, 여기에서 사용하는 합리적 선택 패러다임이 주체들의 내적 동기를 적절하게 고려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도구적 합리성은 마음이나 정신의 동기나 태도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경제적 접근법에서는, 동기나 태도가 효용함수의 특수 변수로 쪼그라들어 무용지물이 된다. (...) 끝으로 세 번째 이유는, 협동조합 기업이 일으키는 긍정적인 사회적 외부성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사회의 민주화이다. 생산 현장에서의 민주주의가 정치 제도의 민주화를 강화하고 지지하는 결과를 이끌어 낸다.[각주:4]


저자 자마니 부부는 여기서 협동조합이 가치를 두는 다른 종류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무시한 채, 주식회사가 신봉하는 재무제표적 기준을 근거로 협동조합 모델을 평가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경제’는 형식적 경제와 실체적 경제의 구분을 다시 명확히 하고, 형식적 경제를 실체적 경제의 수단이라는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입니다. 제도화된 총체적 인간 활동에서 뜯겨 나와 독자적이고 절대적인 체계인 양 군림하는 “경제”를 사회적 가치와 다시 관계 맺도록 하는 작업이지요. 사회적 경제는 경제적 합리성,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돈벌이 경제적 합리성이 유일한 합리성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인간의 경제 활동이 이런 사회적 경제의 영역에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자아 한쪽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다른 한쪽은 민주사회의 정치적 시민이자 비물질적 욕구를 추구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분열된 채 살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제야 우리가 경제 체제의 부속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경제가 우리의 살림/살이를 위해 기능하던 때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1. J.R. 스탠필드 저, 원용찬 역, 『칼 폴라니의 경제사상』, 한울아카데미, p58 [본문으로]
  2. 같은 책, p59 [본문으로]
  3. 같은 책, p67 [본문으로]
  4. 스테파노 자마니/베라 자마니 저, 송성호 역, 『협동조합으로 기업하라』, pp149-150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