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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이야기

시민의 희망, 시민의 한계

『만물은 서로 돕는다』세미나 2회차(5-6장) 발제문


‘시민市民’은 본디 두 가지 외국어 단어를 옮길 때 공히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는 부르주아bourgeois, 또 다른 하나는 시투아앵citoyen(영어로는 시티즌citizen)입니다. 시민계급이나 시민문화, 시민문학 같은 말에서 ‘시민’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것이 부르주아입니다. 특정한 계급, 경제적 계층을 가리키는 단어죠. 두 번째 용례는 시민사회나 시민의식 같은 표현에서 가리키는 바로, 오늘날 보편적으로 쓰이는 의미입니다. 일종의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이 둘이 한 단어로 번역될 수 있었다는 데서, 그 둘 간의 구분이 그리 엄격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부르주아는 말 그대로 ‘부르bourg에 사는 사람’이란 의미였는데, 여기서 부르는 요새화된 성이나 도시, 마을을 가리킵니다. 13세기까지 이 단어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 일반을 지칭했고, 따라서 마찬가지로 도시(시테)에 사는 사람을 뜻했던 시투아앵과 엄밀하게 구분되어 쓰이지 않았습니다.『만물은 서로 돕는다』의 5장과 6장은 부르주아와 시투아앵이라는 말이 생겨나고, 다시 그 두 가지 단어가 서로 분리되어 구별되는 의미를 갖게 되는 시기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 *


“가장 최초의 미개인 법전에는 이미 사회란 서로 싸우는 다수의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화로운 농업 공동체로 이루어진다고 나와 있다. ··· 이들은 전쟁처럼 불확실한 일은 여기저기 떠돌다가 일시적으로 대장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거친 남자들의 전사집단, 또는 ‘대리조직trust’에게 위탁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촌락 공동체의 독립성에 간섭하지 않는 한 누가 지배자가 되든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줄곧 토지를 경작했다. ··· 

미개인들은 천성적으로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를 지향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군사 지도자들에게 종속되는 원인이 되었다.“ _193~194쪽


이 한 문단에서 촌락 공동체 중심의 사회가 봉건 영주제로 넘어가게 된 경위를 대략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장한 세력이 등장하여 공동체를 무력으로 침탈합니다. 이런 무장 세력으로부터 보호받고자 공동체는 다른 무장 세력에 안보를 위탁합니다. 무장 세력은 안보를 위탁받은 지역을 보호한다는 빌미로 이런저런 대가를 누리다가, 결국 지배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맙니다. 이런 식으로 장원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봉건제가 생겨났다고 해서 촌락 공동체가 처음부터 완전히 와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쉽사리 자유를 포기해버리고 영주에게 복속된 삶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은 영주에게 노동력을 갈취당했고 세금을 내기도 했지만, 독자적인 자치권을 지니는 공동체 역시 병존하였습니다. 농민들의 공동체는 “토지의 공동 소유”와 “자치 사법권”이라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공동체의 두 가지 근본적인 권리를 상당 기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주의 지배에서 벗어난 자유도시들이 모습을 나타냅니다. “요새화된 마을들이 영주의 성에 대항하여 봉기”하였고 마침내 영주로부터 독립된 ‘자유도시’를 건설해내기 시작합니다. “이런 움직임은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유럽의 모든 마을이 휘말려들어 백 년도 안 돼서 자유도시들은 지중해 연안, 북해, 발틱해, 대서양, 더 아래로는 스칸디나비아의 피오르드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되찾고자 일어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새로이 공동체를 조직했고, 상호지지와 자유를 좇는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나갔습니다. 공동체들은 이제 스스로 성벽을 세우고 외부의 침략뿐 아니라 영주와 같은 내부 적의 침탈을 막아냈습니다. 수많은 중심지가 촌락 공동체의 힘으로 세워졌고, 서서히 고도화된 도시 조직을 형성해나갔습니다. 촌락 공동체에서 자유도시로의 이전은 급격한 단절이 아니라 연속적인 진화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부르’가 생겨났고, 이렇게 자치권을 누리는 요새화된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르주아’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부르주아는 영주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치권을 누리는 자유도시의 주민들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시투아앵’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이제 도시를 중심으로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면서, 촌락 공동체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공동체가 등장합니다. 농업을 생계수단으로 삼고 토지의 공유를 공동체의 기본 원칙으로 삼는 촌락 공동체는 농업 이외의 활동을 생계 수단으로 삼는 다양한 사람들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공유 토지 바깥에서 경제활동을 이어가게 된 사람들은 상호부조의 본능을 발휘하여 새로운 형식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바로 일종의 동업조합이랄 수 있는 ‘길드’입니다. 길드는 토지를 공유하지는 않았지만, 촌락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자치 사법권과 상호 지원이라는 원리를 근간으로 움직였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길드는 촌락 공동체와 함께 연합하여 중세 도시의 뼈대로 작동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직된 도시들은 자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특허장을 획득하여, 독립적인 도시로서 완전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도시는 중세 국가의 일부로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특허장 아래 독립적 사법권과 행정권을 누리는 일종의 국가 자체였습니다. 나아가 도시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공정한 상거래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시장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사들이거나 다른 사람들은 배제된 상황에서 특별히 유리한 조건에서 사들이는 행위···는 전적으로 금지”되었고 “모든 물건들을 시장으로 보내 거기서 모든 사람들이 종이 울려 장이 닫힐 때까지 살 수 있도록 공급해야” 했으며, “그러고 나서야 소매상들은 나머지 물건들만을 살 수 있었고, 거기서 얻은 이득도 ‘정당한 이득’이어야만” 했습니다. 가격을 책정하는 기능은 ‘시장의 자율’에 맡기지 않았습니다. 1367년 칼케니의 조례를 보면, “상인들과 선원들은 선서를 하고 물품의 처음 가격과 운송비를 진술해야” 했고 그다음에 “시장과 두 명의 사려 깊은 사람이 물품을 판매할 수 있는 가격을 지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절차는 가격에만 적용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업종별 길드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생산품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길드의 구성원들은 사용되는 재료와 최종 생산품이 갖춰야 할 기준을 함께 수립하고, 그 기준이 지켜지는지를 서로 감시하고 관리했습니다. 이런 절차는 당시로선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는데, “중세의 장인들은 생면부지의 구매자를 대상으로 물건을 만들지 않았고 자신의 상품을 알지 못하는 시장에 내놓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물건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고객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였고, 따라서 물건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책무였습니다. 더구나 그 물건을 사들이는 공동체 역시 생산자가 어떤 기술을 갖추었고 어떤 노력을 들이는지 알고 있었으므로, 생산자는 대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중세의 도시는 정치적인 자유를 보호하는 정치조직임과 동시에 상호원조와 지원, 소비와 생산을 위한 경제적 연합이었습니다. 도시 안에는 길드를 비롯한 다양한 공동체들이 조직되어, 창조적인 개인들이 자유로이 협동하는 문화가 꽃피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물건을 정당한 가격에 사고 있다고 믿을 수 있었고, 동시에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좋은 물건을 만들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즐겁게 노동할 수 있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 시대 급진주의자들의 열망은 이미 중세 때 실현되었다. 게다가 현재 유토피아적으로 그려지는 일들이 당시에는 현실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져다. 노동은 즐거워야 한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냥 웃어넘기지만 중세 구텐베르크 조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일을 하며 즐거워야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이 근면과 노동으로 이루어낸 것을 착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법이 근면과 노동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창 하루 8시간 노동을 이야기할 때 페르디난드 1세의 대영제국 탄광에 관련된 조례를 기억해 볼만한데,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토요일 오후의 노동은 금지되었다. 얀센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이상 더 장시간 노동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그보다 더 짧은 시간만 노동하였다. _238쪽


그러나 모두 알다시피, 이런 시기는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대략 10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는 시대에는 연합과 단결의 원리가 다양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제도화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각종 공동체를 통해 대규모의 상호부조가 구현되었지만, 결국 17세기에 접어들며 도시는 쇠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요?



* * *



15세기 말에 이르러 강력한 국가체제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일부 강력한 봉건 영주들은 도시의 영향력 밖에 있거나 자치권이 뚜렷이 확립되지 않은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늘려갔고, 농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전사들을 끌어들이려고 마음대로 촌락을 분배해주었고, 상인들을 불러모아 상권을 보호해주며 자기편으로 규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세력을 넓혀가며 근대 국가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교회 역시 여기에 힘을 보태어 새롭게 등장하는 지배자들에게 신의 대리자라는 영예를 부여해주었습니다. 동시에 자치 도시에 속하지 못한 농민들 역시 기사들 사이의 끝없는 전쟁에 지친 나머지,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수립하려는 왕이나 황제 혹은 대공에 희망을 걸었습니다.

이렇게 강력한 중앙 독재권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자, 자치 도시 역시 그 영향권에 서서히 편입하게 됩니다. 공동체 외부로 밀려난 사람들이 도시 안에 생겨나면서 도시 공동체에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독재권력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을 크로포트킨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중세의 시민들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은 과오를 저질렀다. 성역의 보호 하에 모여들었던 농민들과 장인들을 도시가 형성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던 조력자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과거 시민 ‘가문’과 새로 유입해온 사람들 사이에 날카로운 분열이 나타났다. 원래 시민이었던 사람들에게 공동 교역과 공유지에서 얻어지는 이익이 모두 보전되었지만, 새로 유입된 사람들에게는 직접 자기 손으로 기술을 자유롭게 사용할 권리 이외에 어떤 것도 남겨지지 않았다. 따라서 도시는 ‘시민’ 또는 ‘평민’ 그리고 단순한 ‘거주자’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_261쪽


도시가 저지른 또 하나의 과오는 농업 기반을 저버리고 상공업에만 초점을 맞추면서 지방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더 나아가 지방에 적대적인 정책까지 펼치기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원거리 무역을 통해 상공업이 확대되면서, 부가 도시 전체에 골고루 퍼지기보다는 무역업을 장악한 일부 가문들에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격차가 커지면서 공동체 의식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왕권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자신의 지지자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브루주아라는 말이 다른 색조를 띠기 시작했던 듯합니다. 거대한 공동체로서의 도시가 쇠락하기 시작했던 시점이 브루주아라는 말이 계급적 함의를 갖게 된 때라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때부터 부르주아는 단지 ‘도시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특정한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도시는 점점 닫힌 공동체가 되어 도시민이 누리던 여러 권리는 특정 계층, 바로 브루주아만의 전유물이 되었습니다. 영주에 맞서 도시를 일구던 시절의 브루주아는 귀족의 대립항으로 정의되었지만, 이제 정치적 · 경제적 권한을 틀어잡은 브루주아는 노동자의 대립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시민혁명이 일어나면서, 산업 자본가라는 계층으로서의 시민을 가리키는 브루주아와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시민을 가리키는 시투아앵이 전혀 다른 뉘앙스를 지니는 단어로 나뉘어 쓰이게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중앙집권적 국가는 공동체들이 누리던 자치권을 모두 빼앗아가 통합해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촌락 공동체의 또 다른 근간이었던 공유지에 대한 ‘울타리치기’가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상호부조의 든든한 울타리, 기댈 언덕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남은 선택은 ‘개인주의’뿐이었을까요? 다음 세미나에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만물은 서로 돕는다

저자
P. A. 크로포트킨 지음
출판사
르네상스 | 2005-04-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다윈의 '생존경쟁'과 대위 선율로 울리는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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