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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롤다 회의 끝의 단상

추석연휴가 끼어 있던 탓에 평소보다 긴 텀을 지난 뒤 롤다 회의가 있었다.

3주쯤 롤다 멤버들을 못보니 뭔가 불안한 기분이 스물스물 들었던 게 사실이다. 일이 잘 돌아가고 있나 걱정되는 마음은 사실 아니다. 오래 못본 연인에 대한 마음과 오히려 더 비슷할 거다. 설명하기 쉽지 않은 기분이다.


시청에 협동조합 설립 서류를 접수했는데, 정관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와서 새로 고친 정관에 발기인들의 도장을 찍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스무 장이 넘는 정관 매쪽에 간인을 하느라 시간이 좀 걸려, 내가 도장을 찍는 사이 '중딩들'이 회의 진행을 시작했다. 도장을 찍는 사이 오가는 활기찬 이야기를 듣다보니 흐끄무레 불안불안하던 기분이 싸악 걷히는 게 느껴졌다. "그래,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날 잊지 않았구나!"를 그제야 확인한 철없는 애인처럼.


롤다 회의를 하고 나면 항상 에너지를 얻는다. 롤다에는 압박하는 상사도 없고, 월급 주는 사장도 없지만, 일이 돌아가는 것이 1년하고도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이롭다. 롤다에 시간이 넘쳐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다른 본업이 있으면서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 얼마나 일 벌리길 좋아하는 사람들이겠는가. 사실 본업에 롤다 말고도 다른 활동까지 한두 개씩은 있는 친구들이다. 그런데도 롤다는, 적어도 내 기준에는, 놀랄만한 생산성을 보이며 돌아간다. 코디네이터를 맡고 있는 나는 누구도 지나친 프레셔를 받지 않게 하는데 가장 신경을 쓴다. 롤다가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이 되는 게 롤다의 지속가능성에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바쁘면 다른 사람이 하면 되니까 편하게 얘기해"라는 말이 아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인 것 같다. 그런데 바쁜 걸 뻔히 아는데도, 그 누구도 "바빠서 못하겠어요"라고 말한 적이 없다. 물리적으로 도저히 소화하기 힘들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안을 내놓는다.


또 하나 신기한 일은 모두가 "나는 하는 일도 없는데."라는 말을 다들 입에 달고 있다는 거다. 나는 농담 삼아 "다들 그렇게 말하면, 롤다 일은 대체 누가 하는 거야?"라고 대꾸하곤 한다. 모두가 투잡 체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각자 일정에 따라 일을 많이 하는 시기와 적게 하는 시기가 있다. 그러나 총량으로 따지자면 눈에 띄게 일을 안 하는 사람은 사실 없다. 그럼에도 다들 자기는 일을 별로 하는 게 없다고들 생각한다. 내가 코디네이터이다보니, 한 명 한 명이 얼마나 일을 하는제 구체적으로 아는 아는 사람은 사실 나밖에 없다. 그런데 "너 일 적게 하는 거 아니야!"라고 해도 다들 믿어주질 않는다! 


이런 현상들은 일이 되게 해야 하는 책임, 아니 좀 더 인간적으로 표현하자면 일이 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게 아닐까.


너무 오글거리는 소리인 것 같아 평소에 많이 자제하는 이야기지만, 롤다와의 지난 1년 3개월간 내가 얻은 깨달음, 내가 겪은 변화는 참 경이롭다. 나는 지극히 성과주의적이고도 능력중심주의적인 직장들에서 10년을 일했고, 근본적으로 사람을 잘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내가 뭐에 홀려 롤다를 하자고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하겠다고 나선 순간부터 하나하나가 내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생각보다 모든 게 잘 되고 있고,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롤다에서 점점 더 적은 일을 하는 것 같다. "누구도 지나친 프레셔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게 나 자신에게도 해당한다는 사실을 문득 꺠우친 이후, 모든 게 오히려 더 잘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안달하지 않아도 일은 돌아간다. 아니 내가 안달하지 않을수록 일은 더 잘 돌아간다.

이 사실을 몸으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평생 같이 하면 좋겠어요"라는 '맨날'의 말이나 "투잡이 아니었으면 내 멘탈헬쓰 어쩔 뻔했어"라는 '알렉스'의 트윗이 나에게는 엄청 감동이란 걸, 쿨한 여자 코스프레하는 나는 늘 감추려 애쓴다.


단기간으로는 작든 크든 무언가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는 게 중요하다. 그게 돈이 되고 되지 않고는 둘째 문제다. 뭐든 결과물이 계속해서 나와주지 않으면 진이 빠지기 쉬우니까. 늘 하는 이야기지만, 롤다의 지속가능성은 구성원들이 느끼는 보람, 재미, 가치에서 오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대담하고 "돈이 되는" 그림을 그리면서 나가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단기간의 별것 아닐지 모를 작은 일들에 의미가 담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대담한 그림 안에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지금보다 더 많이, 더 본질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그림이 꼭 실현되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다. 그 그림이 오늘 벌이는 활동에 어떤 숨을 불어넣느냐가 핵심이다.


롤다의 구성원들은 아직 비교적 어리고/젊고, 그래서 이 친구들이 시간이 흐르며 어떤 역량을 갖춰 가느냐가 롤다의 궁극적 비즈니스 모델을 결정지을 것이라고 믿는다. 다들 쑥쑥 자라서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신나는 일을 롤다에 담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롤다 멤버 중 하나가 끝내주는 노래 실력을 갖추게 된다면 롤다는 음반제작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지난 회의 상황으로 봐서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ㅎㅎ)

많은 기업이 "직원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롤다에게 멤버 하나하나는 롤다 그 자체다. 주인(주주)-직원으로, 주체와 도구로 나뉘지 않는 노동자 협동조합, 멤버 하나하나가 주체이자 스스로에게 자신밖에는 수단일 수 없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우리 스스로 말고는 동원할 게 없으니까. 그러니 우리 하나하나가 어떤 인간이냐가 우리의 비즈니스를 결정짓는다.


롤다가 작지만 의미 있는 사례가 되길 바란다. 나는 그런 것들이 모여 '의도치 않게' 세상이 변한다고 믿으므로.

그리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건, 

한번 사는 우리, 롤다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이 좀 더 살만해지길 바란다. 

사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에 대단한 일이랄 게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