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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느슨할 권리가 있는 세상을 원하는 이유

직장 생활 10년 중 7년 정도는 정말 치열한 시간이었다. 처음 4년은 하루 15시간 넘게 일하는 게 다반사일 정도로 바빴다. 주말도 최소한 하루는 대개 일해야 했다.

나만 유별나게 많이 일했던 건 아니다. 그런 직장이었고, 특히 첫번째 직장에선 오히려 나는 라이프스타일을 비교적 잘 관리하는 편이었다. 일찍 결혼했고 주말부부였던 탓에 주말 중 최소한 하루는 남편과 시간을 보내려 했다. 그 회사에서는 일주일에 몇 시간을 일하는지 정기적으로 설문조사를 했고, 팀원들이 지나치게 많이 일하는 프로젝트 팀에는 암묵적인 피드백이 주어졌다. 허구헌날 100시간 넘게를 적어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별명이'사무실 가구(office furniture)'인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프로젝트 중간/최종 발표가 있는 시기가 아니면 대체로 70시간을 넘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나로서는 참으로 열심히 일했던 시기였다. 

6개월밖에 일하지 않았던 두번째 직장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라이프스타일 안 좋기로 악명 높은 직장이었지만, 첫번째 직장도 충분히 터프했으니 뭐, 더 나빠봐야 얼마나 나쁘겠는가 하는 마음으로 이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처절히 틀렸다. 새벽 2시에 퇴근하면, '오늘 일찍 들어간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새벽 4시, 5시 퇴근을 며칠 내리 하고서는, 아침에 눈을 뜨는데 심장이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잠을 못 자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하기도 했다. 6개월만에 직장을 옮긴 것에야 다른 이유도 몇 가지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정말, 이러다 죽겠다 싶었다.


모두가 '치열'을 부르짖고, 일을 최우선 삼는 직업 윤리를 당연히 여기는 세상은 문제가 있다. 6시 칼퇴근을 하려면 무언가 핑계를 대야 하고, 끝없이 열정을 불태우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세상도 싫다. 어느 나라보다도 긴 노동 시간. 여기서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가 비롯된다고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 개인의 문제로 돌아오면, 나는 '치열'하게 일했던 그 시간을 곱씹으며 억울하다거나 쥐어짜였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착취 같은 말을 운운하기에는 돈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그때, 언제나는 아니더라도 대개, 일이 좋았다. 잘하고 싶었고, 점점 잘하게 되는 게 신이 났다. 나 같은 게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맡아 해도 되는 건가, 겁이 날 때도 있었고, 그러면서 그게 즐겁고 감사했다. 너무 잠을 못 자서 제 정신이 아닌 기분이 들 때만 아니면, 대체로 나는 일이 많은 게 싫지 않았다. 그 시간 동안,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걸 배웠다.내 전문 분야랄 만한 것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 - 대화하는 법, 설득하는 법, 협상하는 법, 일이 되게 하는 법 같은 것들을 배웠다. 그리고 또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었다. 닥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풀 수 있는 문제들로 쪼개고, 하나씩 처리하면 결국은 해결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스무 해가 넘도록 잘하지 못할까봐 날선 채로 살고 있었다는 것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이런 것들은 세상의 구조가 변하고, 더 공정한 시스템이 자리 잡는다고 해도, 여전히 갖고 있는 게 다행일 능력들이다. 다만 그런 세상에선 다르게 쓰임 받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사실 여전히 느슨하고 여유있게 사는 편은 아니다. 하루라도 빈둥거리면 마음이 불편한, 좀 지랄맞은 성격이다. 어머니는 아주 예전부터 나에게 "쓸데없이 피곤하게 산다"고 하시곤 했다. 사실 마지막 직장은 그만두기 전 2-3년 동안은 대체로 여유가 있었다. 아마 그런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으면,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른' 생각 같은 걸 하기 시작하지 않았을 테니까. 회사일이 바쁘지 않으니 다른 일로 나를 바쁘게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삶의 가능성이 보였고 욕망이 움직여 버렸다. 그러자 더 이상은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달까.


* * * 


사람은 대체로 자기를 준거로 삼아 다른 이를 바라보기 마련이고, 그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밖에 없다. 모순이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느슨한 세상이길 바라면서도 일할 사람을 고른다면야 열심이고 치열한 사람을 좋아한다. 우습지만, 느린 세상을 부르짖는 일에서도 열의를 쏟아넣길 바란다. 우리 모두에겐 게으를 권리가 있어야 하다고 믿지만, 그렇다고 게으른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느리게 가도 좋은 세상"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유는 치열과 열심이 적어지길 바라서가 아니다. 치열과 열심의 대상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바라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에 느려도 좋을 권리가 있어야, 다른 무언가를 찾을 여백이 생기니까. 나는 결국 한 인간의 '열심의 총량'이라는 게 그리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니 갖고 있는 열심 용량의 대부분을 밥벌이에, 그것도 그닥 원치 않는 밥벌이에 쏟아 넣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 못마땅할 뿐이다. 그 때문에 세상이 재미없고, 정치도 이 모양이라고 생각한다면 비약일까.



사족으로 -))

물론 그 열심과 치열이라는 게 어디서 오는지, 어떤 빛깔을 띠는지는 중요하다. 자의식 과잉에 승부욕으로 점철된 열심과 치열은 자칫하면 자신을 망치고 팀의 조화를 깨뜨린다. 반면, 일의 과정을 사랑하고, 성과물의 완전성을 즐길 줄 아는 것, 배우는 과정을 사랑하는 자세, 거기서 오는 열심과 치열은 근사하다. 그게 내가 항상 익히고 싶은 태도였던 만큼,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싶다, 그리고 함께 일하고 싶다.(물론 순도 100%의 전자와 순도 100%의 후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승부욕이 강하다고 일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배우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고 자의식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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