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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이야기

<액체근대>를 읽고 - 시대적 징후로서의 나



액체근대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 2009-06-08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연대와 해방의 가능성은 사라졌는가? 액체 근대의 세계에서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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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수 있는 안전한 곳을 찾으려고 애써본 적은 없던 것 같다. 소위 "커리어"라는 것을 설계할 때 내가 목표했던 것은 늘 "많은 옵션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 직장이 좋은 곳인가보다 그 직장을 떠나게 됐을 때 얼마나 더 많은 옵션을 가질 수 있는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이 책을 읽고 돌이켜보니, 지극히 "액체근대적"인 커리어의 설계였던 셈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주판알 두드려 커리어를 설계하며 살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선택했을 때 나를 추동했던 여러 욕망도 별 다를 바 없다.


나의 비일관성을 긍정하는 것.

개인 간의 "자유로운" 연합으로서의 공동체를 꿈꾸는 것.

함께 행동하나 같아지지는 않은 것.

머물고 싶어하면서 동시에 늘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

무엇이든 시도하되, 늘 그만둘 자유가 있는 것.

깊은 관계, 그렇지만 속박하지 않는 관계를 원하는 것.

소속한 장소와 은둔하는 장소를 달리 갖는 것.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 있을 수 있는 것.


이 모든 욕망이 실은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이런 것들이 나만의 고유한 욕망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저 욕망들이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은연중에 여겨왔던 듯하다. 그러나 <액체근대>를 읽으며 저 욕망 중 어느 것 하나 "나"의 것이라할 만한 것이 없다는 걸 절감했다.


"나"란 유전자의 우연한 조합과 이 시대가 낳은 산물일 뿐이다. "나"에 속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이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중요한 것은 주체로서의 "나"가 아니라,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나"다.


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게 아니라,

나를 "통해" 무엇을 발견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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