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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각들

계획, 미래, 의미... 같은 것들

며칠 방향을 잃은 기분이었다. 해야할 일은 앞으로 몇 달어치까지 채워져 있는데, 팔을 걷어부치고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해야할 일을 하루어치로 쪼개고, 계획에 따라 남은 일의 양을 차근차근 줄여나가는 게 특기인 나에게는 흔히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딱히 흥이 나지 않아도 일정표에 그날의 할당량을 적는 순간, 대체로는 그걸 지키는 편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상은 '의미'를 묻기 시작할 때 생겨난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정말 이 일은 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렇다면 왜 하고 싶은 걸까.' 이런 질문들은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고, 어찌저찌 적당한 답을 마련하며 그 시기를 돌파하지만, 저 멀리 던져두어도 되돌아올 운명을 띤 부메랑처럼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도 그 적당한 답이란 게 실은 터무니없는 것이기 때문이거나, 그도 아니면 나라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화를 겪기 마련인지라 과거의 적당한 답이 더 이상은 적당하지 않게 되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후자라고 생각하는 게 조금 기분이 낫긴 하겠다.


계획을 세운다는 건 그 계획이 주는 추동력이나 그 안에서 느끼는 상상의 즐거움을 빼고 나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계획을 세울 때면, 그 계획이 일종의 예측이어서는 안 된다고, 그저 오늘을 이끄는 느슨한 가이드에 불과한 것이라고 되뇌곤 한다. 모든 일이 결국은 계획대로 되지 않을 확률이 언제나, 그것도 꽤 많이 존재하며, 고로 계획이 어긋나더라도 그에 맞춰 물 흐르듯 나아가야 한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안달하고 속을 볶는다면, 애초부터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 게 낫다. 


이렇게 계획이란 것에 대해 나름의 생각을 갖게 된 건, 내가 계획 없이 사는 걸 영 불편해 하는 종류의 사람이며, 그로 인해 생기는 스트레스를 극복하려고 십수 년을 부단히 애써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츰 나이가 들면서, 단기적인 계획은 세울지언정 6개월이 넘어가는 장기적인 계획에 대해서는 대체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왔다.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볼 때, 장기적인 계획이란 게 제대로 이루어진 적도 없거니와, 애초에 그 장기 계획은 목표했던 그 시간에 가닿기도 전에 아예 모습을 달리하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먼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조바심을 내는 일에 쓸모 있는 구석이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떨치지 못하는 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쌓여 어떤 결과를 낳겠는가라는 고민이다. 그걸 미리 알 수는 없다고, 그걸 지표 삼아 오늘 무엇을 할지 결정해선 안 된다고, 머리는 그렇게 말하지만 미래의 시간으로 달음질쳐나가는 상상력을 오늘 이 순간에 붙들어두기는 쉽지 않다. 그리하여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나, 정말 이 일은 하고 싶어 하는 걸까, 그렇다면 왜 하고 싶은 걸까.'


꼬박 닷새 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책 두어 권을 읽고, 운동을 좀 하고, 모처럼 텔레비젼을 실컷 보았다. 일정표에 써놓은 to-do list를 무시한 채 닷새를 보내기란, 나 같은 인간에게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게 했다. 꾸역꾸역 나를 밀어부치기보단, 다시 '하고 싶은 마음'이란 게 떠오르길 기다려주고 싶었다.


어제는 오전부터 한참을 밖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가 막힌 가을 날씨가 나를 도왔다. 따끈한 햇살에 선선한 가을 바람, 파랗고 높은 하늘, 원근감이 사라질 만큼 깨끗한 시계. 날씨와 풍광을 만끽하며 땀을 흘리고, 남편과 내가 좋아하는 동네의 단골 음식점에 가서 막걸리 한잔을 들이켰다. 복잡한 생각 같은 건 다 별일 아닌 듯 느껴졌다. 그냥 다 기분 탓이었겠거니, 하는 마음이 들었다.


길은 걷는 자에겐 늘 앞을 향할 뿐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왔다. 엊그제 쓴 글에서처럼, 무한의 시간 앞에서 의미랄 게 무엇이 있을까. 

의미라고 말하지만, 떨칠 수 없는 인정 욕구요 부질 없는 성취욕이 진짜 모습인 건 아닐까.


이번엔 좋은 날씨와 막걸리 한잔 덕에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지만, 저 질문들은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때에도 며칠 만에 질문들을 떨쳐내고 길을 다시 걸을 수 있기를, 운 좋게도 그렇게 건강할 수 있기를 바랄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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