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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일과 정체성

세상은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를 준거로 나를 바라보는데, 나는 그 일과 나를 동일시할 수 없거나,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아마도 일을 둘러싼 한 가지의 괴로움이 여기서 파생할 것이다.


세상 사람이 "저는 XX회사에서 XX하는 아무개입니다."라고 소개했을 때,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당신이 평생 그 회사에서 그 일만 할 것도 아닌데."

라고 여겨준다면야 일이 나의 정체성인지 아닌지가 무엇이 중요하겠냐마는.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이다. 사람들은 집요히 당신이 어디서 무슨 일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고, 그 답을 알고나서야 머릿속 지도에 당신을 위치시키고 마음 놓을 것이므로.


고로 일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는 사회와 끝내 불화하는 기분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혹은 얻어 쓴 가면을 얼굴에 붙이고 사는 듯한 느낌에 시달리거나.


그러나 일을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게 마음만 다잡는다고 될 일이겠나. 일이 정체성이 되려면, 세 가지 조건 중 최소한 하나는 만족시켜야 한다. 최.소.한.


첫째, 역량의 확장을 가져다 주는 적당히 도전적인 일. 일을 하는 자신을 스스로 멋지다고 여길 수 있으면, 자연스럽게 일과의 동일시가 이루어진다. "나는 XX하는 사람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할 때, 자괴감이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면, 그 일이 나의 중요한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둘째, 경제적 안정성을 주는 일. 그를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면, 나를 이루는 일부로 그 일을 받아들이려 최소한 애쓰게 될 것이다. 그 일이 오랜 시간 가족을 먹이고, 노후를 즐거이 누릴 기반을 선사할 것이라고 믿어도 좋다면, 일상의 지루함과 고단함, 비천함을 어느 정도는 인내할 수도 있을 테니.


셋째, 공동체적 결속을 주는 일. 일 속에서 맺는 관계망 안에서 환영 받고 보호 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나는 오랜 기간 그 공동체의 일원이길 소망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을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청년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대개 저 중 하나도 주지 않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보통 이 셋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점이다. "하나만이라도"의 소망은 "단 하나조차"의 절망으로 이어지기가 십상이다. 

장기적 관점으로 일할 수 없는 직장에서 역량의 확장을 가져다 줄 일을 만나기는 어려우며, 경제적 안정성을 담보 받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오래 가는 관계를 구축하고자 에너지를 들이는 건 서로 간에 고통스러운 일일 게 뻔하다. 겉으로는 상냥하면서도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인다 해도, 근사히 말하면 '공적 관계'를 위한 위장술일 뿐. 진심을 보이는 위험함을 부르짖는 처세서는 분명 어떤 진실을 담고 있다. 


그렇게 수많은 이가 이 직장과 저 직장을 부유한다. 과거라면 상승을 전제하고 있을 이직/전직은 이제 표류이거나, 탈진/재충전/다시 탈진의 리듬을 따르는 반복운동일 뿐이다. 그 와중에 그나마 경제적 안정성이라도 붙들어 내려면, "자신에 투자하여 자기의 계발을 이루어내야" 한다. 투자자도 투자처도 당신 자신뿐이다. 일 해내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면, 그것이 조직이나 회사, 고용인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할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직장이 당신에게 어떤 안정성도 담보해주지 못할 때, 일을 배우기 위한 동기부여는 오롯이,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능한가 아닌가가 아마도 당신의 명운을 가를지도. 물론 거기에 꽤 많은 다른 행운이 따라줘야겠지만.


과연 한 집단으로서의 우리에게,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나'에게 남은 선택지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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