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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각들

죽음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 진단 받으신지 정확히 넉 달만이었다. 건강하셨던 분이었고, 아까운 연세였다.

어머님은 믿음이 깊으셨던 덕인지 죽음 앞에서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의연하셨다. 예전부터 나는 어머니를 인간적으로 존경했는데, 마지막 과정에서 보여주신 모습에 존경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런 어머님이 이젠 계시지 않다.

어머님이 평생을 다니신 교회 담임목사의 위로예배 설교를 듣다가 펑펑 울었다. 나는 그 담임목사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설교의 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담임목사는 어머님이 능력과 관계를 모두 갖추었던 교회의 든든한 일꾼이었다고 평했다. 그 말에 눈물이 났다. 내가 생각하던 어머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기 때문이다.  그런 어머님이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눈물이 났다.


* * *


신을 믿지 않으며, 신체가 곧 인간이라고 믿는 내게 모든 장례절차는 거대한 부조리극이었다. 그나마 얼마 전 읽은 [바른 마음]이 절차를 치러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모든 절차에 나름의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럼에도 내가 죽는다면 이런 건 하지 말아 달라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죽은 뒤에야 내가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내 자신의 장례 절차 말고는 내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례 절차란 없을 테니.


그럼에도 내세를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좀 부럽긴 했다. 하지만 그런 걸 믿고 싶다고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니, 종교 없이 사는 삶의 대가를 받아들일 밖에. 

종교가 있기에 건넬 수 있는 모든 위로의 말이 아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게 대가 중 하나다. 좋은 곳에 계실 거란 말도, 신이 사랑해 데려갔단 말도, 천국에서 만날 거란 말도.

입관을 하며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전하라는데 입도 뗄 수 없었다. 몇 마디 할 수 있다면, 거기 둘러선 사람들을 위해서겠지. 어머님은 이제 없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으시다. 아니 사실 이미 몇 주 전부터 그러하셨다.


나와 남편에게 위로가 되는 유일한 사실은 어머님께 못한 말이 없다는 것, 그리고 어머님 본인이 아쉬움 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 큰 고통 없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남 눈치 그리 보지 않고 본인이 믿기에 좋은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 연배에 흔치 않은 미덕이다. 그래서 나는 시어머님이 좋았다. 자식으로서 죄송스러운 게 하나 있다면, 신앙을 잃은 탓에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달리 어찌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니 역시 후회할 일은 아니다.


나는 그리 다정한 며느리는 아니었다. 사실 내가 누구에게도 딱히 그런 인간은 아니기에. 하지만 나는 어머니와 인간적으로 잘 통했다고 생각한다. 내게 무리한 요구는 단 한번도 하신 적이 없고, 내가 어머님께 해드린 것 중 어떤 것도 억지로 했던 것은, 적어도 지금 기억으로는, 없었다. 

결혼을 하고 처음으로 '안부 전화'라는 걸 드렸을 때, 어머님은 "어쩐 일이냐?"라고 의아해 하셨다. 그때 알았다. 우리 어머님이 한국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는 시어머니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남편이 누차 얘기했어도 결혼 전에는 믿지 않았었다.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를 남편이 설명했을 때도 머리로 이해하셨고, 그 후로 단 한번도 아이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으셨다.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분이었다. 사실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분이 내 시어머님이었으니, 나는 정말 행운아였다. 올해로 결혼 생활 13년차다. 13년 내내 내가 결혼을 잘했다면 절반은 좋은 시부모님의 덕이라고 생각했다.


* * *


어머님과 내가 일상을 나누던 사이도 아니었고, 각별히 정이 깊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상실의 감각이 큰 것은 아니다. 금세 일상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아마 내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것은 허무감이지 싶다.

누군가가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허무감은 위로의 대상도 극복의 대상도 아닌 것 같다. 신심 깊은 누군가가 "왜인지를 묻게 되지 않느냐"고 했는데,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런 물음에 시달리지 않는 대가가 허무감이겠지. 그렇지만 허무함을 받아들이고 사는 수밖에 없다. 달리 별 방법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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