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읽은 책 이야기

<짜라투스트라> 3부를 읽고 썼던 글.

오늘 아침을 먹으면서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에 이 글을 쓰면서 했던 생각이 났다.

전부를 올리면 스크롤 테러이니 그중 일부만. ㅎㅎ

 

한마디로 줄이자면,

미래를 긍정으로 열려면 과거 역시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한다는 게 아니라, 필연이란 얘기다.

 

-----

 

모든 사건은 우발적이다. 그러나 우발적이라 함은 인과관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신들이 즐기는 주사위 놀이. 주사위가 던져졌을 때, 어떤 숫자가 나올지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숫자가 나올 것임을 미리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주사위가 던져지는 순간, 내 손목의 각도, 힘이 실린 정도, 그 순간 스쳐 지나간 바람, 탁자 위에 떨어지는 방향, 탁자가 주사위를 다시 튕겨내는 탄성의 정도 - 그 모든 것이 원인이 된다. 탁자 위에 모습을 드러낸 주사위의 숫자, 그것을 결정한 원인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원인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것, 던진 이의 의도 따위가 조정할 수 없는 무한히 많은 원인이 복합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인과관계를 인지할 수 없게 되며-만일 우리가 하나의 인과관계를 본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원인들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 지각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모든 사건은 ‘우발적’인 것이 된다. 이때, 과거와 미래를 바꾸는 유일한 가능성은 “다시 한 번!”이라는 외침으로 한 번 더 주사위를 던지는 행위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던진다 해도 원하는 숫자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다시 던지지 않는다면 원하는 숫자가 나올 가능성조차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차라투스트라에겐 원하는 숫자 같은 것은 없다. 一者적 목적이 사라진 곳에 그가 추구하는 것은 변화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은 과정이다. 그렇다면 다시 던지는 순간, 변화를 향한 의지와 욕망은 만족된다. 기존의 사건이 “4,5,2,3”이었다면, 주사위를 다시 던진 순간, “4,5,2,3,X”라는 사건으로 변화하는 것은 필연이므로. X가 무슨 숫자이건 간에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이라는 마법 같은 주문으로 언제나 바로 이 ‘순간’에 새로운 사건을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과거는 더 이상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새로운 우발적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과거가 무엇의 원인이 되느냐는 앞으로 펼쳐질 사건에 달려 있다! 그리하여 드디어 과거에 대한 의지를 숨기지 않고, 시간과 화해하며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었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쯤에서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뭐야, 모든 것은 우연이니까, 우발적으로 변화할 무언가를 마냥 기다리면서 그냥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해보라는 거야?”라는. 그런 거라면 대책 없는 낙관주의하고 별반 다를 것이 없게 들리며, 깨달음 운운하기조차 민망해진다. “다시 한 번!”을 외치면서 더해지는 하나의 시도. 그리하여 “4,5,2,3”을 “4,5,2,3,X”로 변화시키는 행위, 그것은 단순한 반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오늘은 늘 타던 310번 버스 대신 지하철 2호선을 탔다고 이를 새로운 사건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단순한 반복과 재시도가 아닌, 새로운 ‘사건’을 구성해 내려면 우리는 “어떻게 의지하는지” 배워야 한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의지를 (또는 원함을) 언제나 이중적인 또는 재배가된 어떤 것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가 진정으로 한 사물을 원한다면, 그는 또한 이 사물을 초래하는 우연도 원해야 한다.”고 해석한다. “이는 의지가 우연을 다른 어떤 것, 우리의 의지에 의해 초래되는 어떤 것으로 바꾼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반대로 의지는 정확히 그리고 단순히 그것을 우연으로서 원함에 의해 우연을 지배하거나 “무장해제”할 수 있다.” 이것은 삶의 순간순간, 벌어지는 사건들을 단독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오늘 이 순간의 “나”라는 존재, 오늘 현재 발생하고 있는 이 사건은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온, 그리고 미래로 연결되는 흐름의 일부이다. 그리하여 행복한 순간들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과거 전체와 떼어놓을 수 없는 하나의 “계열화된” 사건들의 일부로서 그 순간들을 의지할 수밖에는 없다. 결국 우리는 과거 전체를 모두 “한 번 더!”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더해지는 사건 X만이 아니라, 결국 “4,5,2,3”을 포함하는 하나의 새로운 계열, “4,5,2,3,X”이다. 그리고 “4,5,2,3”이 없이 X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의지는 “과거와 현재라는 두 시제를 가진다는, 그리고 모든 이중 긍정은 “미래완료”와 같이 - 즉, “나는 이것을 원한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나는 이것을 원했던 것이 될 것이다I will have wanted this”라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테제를 이해해야 하는 방식이다”라고 표현된다. 우발성의 무시무시한 그물 안으로 자신을 던져 넣는 것, 나의 원함이 가져올 모든 우발성의 부산물을 받아들이는 것. 이 ‘순간’의 “다시 한 번”이 어떻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겨냥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래완료의 시제,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영원히 완료되지 않는 미래완료의 시제를 통해 우리는 모든 지나간 모든 우연과 앞으로 다가올 우연에 대해서까지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위장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모든 것을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구제”할 수 있게 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니체전집 13)>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 정동호<정오의 그림자> - 알렌카 주판치치 / 조창호

'내가 읽은 책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삼촌 브루스 리  (0) 2012.03.16
미셸 푸코  (0) 2012.03.02
하루키  (4) 2012.01.17
라 선생님 말이 나온 김에...  (0) 2012.01.03
기능과 건강  (0) 2011.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