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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거나 옮기거나 만든 책 이야기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 옮긴이의 말

사람들은 단순한 것에 열광한다.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만병통치약이 팔려나가고, 각종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원 푸드 다이어트가 성행하고, “이 책 한 권만 보면 영어에 능통해진다”류의 책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해당분야의 전문가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만한 ‘초간단’ 이론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현혹되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이다. 시장 하나로 모든 복잡한 경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니 얼마나 간편한가! 하지만 그렇게 단순해 보이는 이론 뒤에는 수많은 가정이 숨어 있다.


이면에 숨어있는 가정을 겨냥하여 불편한 진실을 말해주는 경제이론이 있다. 바로 이 책이 펼치는 논리의 바탕에 깔려있는 ‘차선이론’이다. 애덤 스미스가 가정하는 시장은 완전경쟁이 일어나는 시장이다. 즉, 시장이 ‘완전’할 때 경제는 완전효율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차선이론은 그런 이론이 현실적으로는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만약 완전경쟁을 위한 요건이 하나라도 충족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손은 더 이상 그 기능을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지 못한다면, 거기에 근접할수록 더 나을 거라는 보장조차 없다. 이미 완전경쟁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있다면(현실의 모든 시장이 그렇다), 완전경쟁에 90% 근접한 시장이 80% 근접한 시장보다 효율적일 것이라고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시장이 효율을 증진시키는 장치라는 개념은 완전경쟁이 존재하는 이데아적(的) 세상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자유시장 경제체제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는 신화, 바로 “시장을 최대한 완전경쟁 체제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념은 단순함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픽션에 불과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IMF나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금융기구가 이러한 픽션을 현실이라고 가정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완전경쟁 시장에 최대한 근접해야한다는 계몽적 목표를 내걸고, 수많은 개혁과제를 개발도상국에 들이민다. 논리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실천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어떤 나라도 이 수많은 개혁과제를 단번에 성공적으로 실행할 수는 없다. 따라서 모든 개혁과제가 완수되기까지의 기간, 즉 완전경쟁 시장에 도달하지 못한 기간 동안 경제에 어떤 역효과가 발생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모든 개혁과제가 완수되었다고 최대의 효율이 발생하리라는 법조차 없다. IMF나 세계은행은 “이제 2세대 개혁을 할 차례야”라며 또 한 무더기의 개혁과제를 얹어놓을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들 세계기구가 지난 20여 년간 해온 일이다. 완전경쟁 시장이란 물리학에서 가정하는 마찰력이 없는 바닥, 공기저항이 없는 진공 상태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호흡하며 살아가는 세상에 완전경쟁 시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론과는 다른 현실에서 경제학의 법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어차피 이론과 현실은 같지 않으니, 그냥 손 놓고 있자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대니 로드릭은 개발도상국이 최대 효율의 결과를 얻으려면 오히려 불완전한 시장요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방식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차선이론을 주창한 랭카스터와 립시는 완전효율에 최대한 가까운 결과를 얻으려면 오히려 완전경쟁 시장의 성립요건을 몇 개 더 깨뜨려야함을 증명해 보인 바 있다.) 중국의 이중개혁이나 향진기업과 같은 정책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경제개발에 성공한 개발도상국이 추진했던 산업정책의 대부분은 시장을 완전경쟁 상태에서 오히려 더 멀어지도록 만듦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대니 로드릭은 각 나라가 처한 상황을 제대로 ‘진단’하여, 그 나라 고유의 기회와 제약요인을 찾는데서 시작하라고 말한다. 병이 무엇이든 통하는 만병통치약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소식이 아닐 수 없지만, 현실은 언제나 간단치 않은 법이며 경제개발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하면, 그렇게 나쁘기 만한 소식은 아니다. ‘진단’이 제대로만 이루어진다면, 해결책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IMF가 들이민 수많은 개혁과제보다 훨씬 쉬운 처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국이 ‘단순한’ 완전경쟁의 논리로 농산물 시장을 자율화했다면, 실제로 선택했던 ‘이중 노선’ 개혁보다 훨씬 나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가 간단하게 산업 발달을 ‘시장의 논리’에 맡겨버렸다면, 실제로 행했던 ‘정부주도의 산업육성’보다 더 쉽게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을까? 대니 로드릭이 제시하는 길은 더 어려운 길이 아니다. 현혹되기 쉬운 단순논리의 픽션을 던져버리고, 각 나라가 스스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 접어들면서 탄생한 또 하나의 ‘단순 논리’가 문제를 조금 더 복잡하게 만든다. 해외시장에 진출하여 무역을 확대할수록 경제성장이 빨라진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개발도상국이 선진국 시장에 물건을 내다팔 수 있다면, 경제개발이 촉진될 것임은 자명하다. 문제는 이를 위해 치러야할 대가이다. WTO와 선진국의 요구는 단순히 관세를 낮추고 시장을 상호 개방하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들은 노동조건 및 환경기준, 산업정책의 문제까지 거론하며, 평등한 경쟁의 기반을 운운한다. 결국 무역확대라는 단순논리 아래 이러한 조건들을 받아들이다 보면, 개발도상국의 정책적 자율성은 점점 줄어든다. 결국 자국의 현실에 맞추어 스스로 해법을 찾는 일이 불가능해지고 마는 것이다. 대니 로드릭은 “세계 전체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WTO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경제개발의 도구에 불과한 무역확대를 목표로 삼아 버림으로써, WTO가 오히려 경제개발에 반하는 체제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에 대해 대니 로드릭이 제시하는 해법은 무엇일까? 저개발국가가 충분한 정책적 자율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산업육성책을 실험할 수 있도록, 세계 무역체제는 지금보다 훨씬 유연해져야 한다. 이것이 경쟁기반을 불평등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진 산업국가가 경제개발을 위해 각종 산업정책을 실행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실행했던 산업정책 대부분이 오늘날의 무역체제에서 금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단지 늦게 출발했다는 이유만으로 오늘날의 선진국이 과거에 누렸던 혜택을 저개발국가가 누릴 수 없다면, 그것은 공평한 게임의 법칙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개발도상국은 선진국들이 무역체제를 유연하게 바꾸어주길 기대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일까? 대니 로드릭은 선진국 대부분의 시장이 이미 충분히 개방되어 있는 상황에서 추가적인 개방을 얻어내기 위해 정책적 자율성을 일부나마 포기하는 일에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선진국 시장에 보다 용이하게 진출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은 특정 산업에게만 돌아가기 쉬운 반면, 정책적 자율성을 포기함으로써 생기는 기회비용은 국가 전체가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기회비용은 국가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미래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극히 제한적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에 경제성장을 가져다 줄 단 하나의 해법은 없다. 이것은 세계화 시대의 철칙처럼 여겨지는 시장개방이나 무역확대 같은 문제에도 적용된다. 이 책은 모든 ‘단순 논리’의 허구를 배격하며, 모든 나라가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각 나라가 처한 고유의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서 나는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고객사들은 컨설턴트가 수많은 회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바탕으로 얻은 마법 같은 해법을 가지고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컨설팅은 쿠키를 찍어내듯, 똑같은 해결책을 모든 회사에 적용하면 되는 일이 아니다. 모든 경영 컨설팅 프로젝트의 시작은 ‘진단’일 수밖에 없다. 모든 기업은 다르며, 따라서 성장을 위한 해법 역시 달라야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그럴진대,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한 국가는 어떻겠는가?

단순 논리가 득세하는 세상에서 “그때그때 다르다”는 주장은 얼핏 너무나 당연해서 지루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정답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정답은 당신에게 있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환영받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니 로드릭의 지극히 현실적인 주장을 하나하나 따라가 보길 바란다. 그러면 당신도 나처럼, 오히려 단순 논리가 현실을 복잡하게 만들어 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더 나은 세계화를 말하다

저자
대니 로드릭 지음
출판사
북돋움 | 2011-03-15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세계화의 과실(果實)을 모두가 즐기려면…장하준을 뛰어넘는 대안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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