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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거나 옮기거나 만든 책 이야기

<디자인과 진실> 옮긴이의 말


디자인과 진실

저자
로버트 그루딘 지음
출판사
북돋움 | 2011-08-25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디자인은 우리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보이지 않는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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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이라는 말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연상하나요? 일상에서는 도저히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옷을 걸치고 런웨이를 도도히 걸어가는 패션모델을, 아니면 유려한 곡선미를 뽐내는 스포츠카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산업화 시대의 유행어가 되어버린 듯한 “디자인은 경쟁력이다”라는 말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이렇게 디자인은 통상 “판매를 위한 물건을 설계하거나 그 외양을 꾸미는 일”이라고 인식되고, 또 그렇게 정의되기도 합니다. ‘나’를, ‘행동’을, ‘생각’을, ‘기업’을 디자인하라는 제목으로 쏟아지는 각종 경제경영서와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디자인도 산업화 시대의 고전적인 디자인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좋건 싫건, 모든 것이 상품으로 변모하는 시대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 책은 디자인에 대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소통으로서의 디자인’,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창조로서의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디자인이 주는 것은 경쟁력이 아니고, 진실이요 자유라고 말합니다. 때가 어느 때인데 한가롭게 낭만이나 찾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소통과 정의란 말이 어느 때보다도 애틋하게 들리는 요즘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뜻밖의 디자인 이야기에 한번 귀 기울여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소통으로서의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1부는 센노 리큐의 죽음에 얽힌 일화에서 시작합니다. 센노 리큐는 일본 다도의 스승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지요.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치하던 16세기 후반에 다도가 크게 유행하였다고 합니다. 도요토미가 집권했던 시기에는 휘황찬란한 성곽과 저택, 절과 신사가 곳곳에 지어졌으며, 이런 화려한 건축물의 내부를 채우기 위한 다양한 공예품도 발달했습니다. 이런 조류에 맞추어 다도에도 값비싼 다기와 화려한 예식이 덧붙여졌습니다. 이때 등장하여 다도에 새로운 흐름을 일으킨 이가 바로 센노 리큐입니다. 그는 다도의 본질, ‘차와 차를 마시는 사람’에 집중한 새로운 다도예식의 일체를 ‘디자인’했습니다. 그는 우선 차를 마시는 공간인 다실(茶室)을 흙벽과 나무 기둥 등이 그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스런 공간으로 만들고, 그 크기 역시 대폭 줄였습니다. 센노리큐가 지은 다실은 다다미 넉 장 반 이하의 규모(다다미 두 장이 한 평가량의 크기)였고, 다실로 들어가는 문은 너비와 높이가 1미터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런 문을 통과하려면 몸을 잔뜩 움츠리고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해야 했지요. 이는 다실 밖 세상의 지위와 권위를 모두 내려놓고, 모두 똑같은 ‘차를 마시는 사람’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탄생한 센노 리큐의 다도를 와비차(侘び茶)의 세계라고 칭합니다. 저자는 센노 리큐의 다도가 “진실을 전하는 디자인”이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다도’라는 탈을 썼지만, 권력과 지위를 드러내려는 화려한 예식일 뿐이었던 이전의 다도가 “거짓을 말하는 디자인”이었다면, 센노 리큐의 다도는 ‘차를 마시는 행위’라는 본질만을 고스란히 녹여내어 진실을 전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센노 리큐가 다도를 통해 말한 진실은 히데요시가 그를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게 할 만큼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소통의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거짓이 아닌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행위의 본질, 행위에 참여하는 주체의 내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디자인이야말로 진실을 전하는 소통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통으로서의 디자인이 진실을 전한다면, 자기 창조로서의 디자인은 자유를 선사합니다. 잠깐 심리학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Stumbling on Happiness)』에서 사람들은 통제력을 행사하는 데서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무언가를 통제해서 얻게 될 결과 때문이 아니라, 통제하는 행위 그 자체가 행복감을 선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하나 소개합니다. 요양원에 거주하는 노인들에게 화초를 주고, 노인 절반에게는 화초를 돌보는 일을 스스로 하도록 했고, 나머지 노인에게는 화초를 돌볼 직원을 투입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6개월 후, 화초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집단은 15%의 사망률을, 두 번째 집단은 30%의 사망률을 보였습니다. 덧붙여, 학생 자원자들을 모집해 노인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했는데, 한 집단에는 학생들의 방문시간과 머무는 시간을 노인 스스로 결정하도록 하고, 나머지 집단에는 그런 통제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2개월 후, 방문시간을 결정할 수 있었던 높은 통제 집단은 더 건강하고 행복하고 활동적이었으며, 더 적은 양의 약을 복용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화초를 돌본다든가, 봉사자의 방문시간을 결정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일 같지만, 한 사람에게 건강과 행복을 선사하는 커다란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 책의 저자가 고장 난 텔레비전 리모컨을 수리하면서 느꼈다는 해방감으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루딘은 처음에는 리모컨을 터무니없이 약하게 만들어놓은 TV제조업체에 분노하며 시작한 그 간단한 행위에서 자유의 느낌을 만끽했다고 털어놓습니다.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자신이 원하고 그리는 대로 무언가를 창조해나간다는 것이고, 그 속에서 얻게 되는 것이 바로 자유이고 해방감이지요. 여기서 창조의 대상은 아주 단순하게는 화초나 고장 난 리모컨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하루일 수도, 아니 미래의 자신이 갖게 될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제퍼슨처럼 국가의 미래상을 창조할 수도 있으며, 구글처럼 정보가 유통되고 생성되는 방식을 새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루딘이 이야기하는 자기창조로서의 디자인은 통제력을 행사하는 행위이며, 여기서 디자인은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 더 많은 사람에게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자유를 선사하게 됩니다.

 

이 책은 디자인이라는 행위가 지닌 다양한 측면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루딘은 차를 마시는 행위, 그림을 그리는 행위, 건축물을 설계하는 행위, 가족이 쓸 가구를 직접 만드는 행위, 기업을 경영하는 행위, 책을 쓰는 행위 등, 도저히 연관성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수많은 행위가 모두 디자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 행위에 진실이 담겨 있기만 하다면, 그리고 그 행위가 당신을 자유롭게 하기만 하다면! 디자인은 경쟁력이라는 기치 아래 매끈하게 새단장된 여느 도시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깊은 디자인의 세계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 같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