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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직장을 그만 둔지 2년

소위 직장인으로 산 것이 10년. 그중 통틀어 3-4년쯤은 그곳에서 살아남고자, 인정받고자 아무 생각 없이 정말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 그 기간을 빼고 나면, 늘 정체를 뚜렷이 정의하기 어려운 회의감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는 일이 부끄럽다는 감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간단히 규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이 일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파악할 수 없는 게 불편했고, 사람들이 말하는 내 일의 의미라는 것에 전혀 공감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직장을 그만둔 지 2년이 조금 지났다. 직장을 그만두면서 “내가 직장인이기를 그만둔 50가지 이유”같은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이제 사라졌다. 지금 와 보면 이유가 50가지나 됐었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어쨌건, 그런 결정을 내렸던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기록을 해두고 싶다.


내가 번역하는 책에 넣는 역자 프로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마 이 문장이 직장을 그만둔 가장 중요한 이유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직업으로 ‘나’를 규정하는 삶에서 벗어나 노동과 유희의 경계를 지우며 사는 삶을 꿈꾸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을 “직업과 나이”로 소개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머릿속에 다른 사람을 분류할 때도 그 두 가지가 기본이 된다. 나는 나 자신을 “프라이빗에쿼티 뱅커”라고 소개하는 것이, 그렇게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 참 싫었다. 더구나 흔치 않은 직업인지라 이 한 마디로 끝나지도 않았다. 꼭 질문이 뒤따르기 마련이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참 구차스럽단 느낌도 들었다.


일만을 놓고 보면, 일이 늘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순수하게 task만을 놓고보면, 오히려 일을 꽤 즐기기도 했던 것 같다. 일의 흐름에 빨려들다 보면, 엑셀 모델 속에 회사 하나를 통째로 집어넣어 이런저런 변수를 바꿔가며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시뮬레이션해보는 게 재밌다고 느낀 적도 많았다. 엑셀 모델을 만드는 건 심시티 오락 같은 면이 있어서, 세계를 빚어내는 창조주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모델을 만들다 보면, 무아지경에 빠져 눈 깜빡하는 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 있곤 했다. 그 엑셀 모델이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지만 않으면, 그 일에는 순수하게 재밌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한 걸음 떨어져 내 일의 의미, 나를 둘러싼 조직을 바라볼 때, 그림은 언제나 희뿌연 안개에 휩싸인 듯 명료하지 못했고, 그나마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조차 그다지 자랑스럽고 뿌듯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특히 나 자신 그대로가 아니라, 맡은 역할을 연기하며, 확신 없는 말을 확신에 가득 찬 듯 말해야 하는 것이 저에겐 가장 큰 고역이었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할 말, 혹은 내가 상대방이라면 듣기 싫을 말을 돈 받는 대가로 “프로페셔널하게” 늘어놓아야 할 때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이 저를 괴롭혔다.


첫 번째 단계로 직장을 당장 박차고 나갈 만큼의 확신이 없었던 내가 내릴 수 있었던 선택은 직업으로 규정되지 않는 영역을 넓히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직장에 있는 시간, 일하는 시간을 최소로 하고, 퇴근을 하는 순간 직업으로 규정되던 자아를 탈탈 털어버리고 다른 나로 살아가야지 맘먹었더랬다. 그때부터 글쓰기 수업도 들어보고, 이런저런 인문 강좌도 들었다. 이 즈음에는 대개 6시 땡 퇴근이 가능한 일상이었고 사무실에서 철학책 펴놓고 읽을 때도 잦았으니 사실 그리 나쁘지 않았다. 배부른 고민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런 부조화는 늘 위태롭게 느껴졌다. 


단순히 이중생활이 주는 불편함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로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침탈받을 위기에 있었다. 오랜 시간을 일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일이 닥치는 순간 내 24시간을 온전히 일에 바쳐야 하는 자리였으니까. 


그러니까 365일 대부분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국경을 지키는 군인 같은 신세였던 셈이다. 국경에 앉아 원하는 책도 읽고 원하는 글도 쓰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있지만, 적이 다가오는 낌새만 보여도 하던 다른 모든 일을 내려놓고 나의 온 신경과 존재 전체를 전투태세로 돌려놓아야 했다. 그러니까 내가 받는 돈은 노동력의 대가라기보다는, 일을 최우선순위로 삼아 필요한 순간, 무조건 내 존재를 전장에 가져다 놓겠다는 약속의 대가였던 셈이다. 더구나 왜 하는지 모르는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결국 노동과 유희를 따로 떼어놓고 그 사이에 경계를 짓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경계가 움직여 노동이 유희의 몫을 잡아먹을 위험에 언제나 놓여 있다는 의미였다. 


***


아니 애초에 그 둘을 가른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노동과 유희를 가르는 구분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은 내가 아무 열정이 없어도, 대충 처리해버린다 해도 쓸 데 있는 일로, “노동”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돈이 벌리지 않는 일은 온 열정을 다 한다 해도 쓸모없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재밌는 것은 이 구분이 일의 본질이나 성격에 따라 정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금융업 종사자인 내가 아무리 열심히 스키를 탄다고 해봤자 쓸데없는 유희일 뿐이지만, 스키강사가 일당 채우겠다는 생각으로 설렁설렁 스키를 탄다면 그의 스키는 쓸모있는 노동이라는 거다. 이런 식의 구분이 참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오늘날 대부분이 그런 구분을 받아들이고 “제 직업은 X고 취미는 Y예요.”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대부분에게 X는 Y보다 우선하며 또 그게 돈 받는 자로서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지만, 내게 남들이 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정당화의 근거가 전혀 될 수 없었다.


결국 직업과 나의 거리, 노동과 유희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졌고, 달나라 별나라처럼 멀리 떨어진 두 세계를 함께 끌고 살아가는 일을 지탱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더구나, 크리스천이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제게 가장 소중한 자원은 돈도 뭣도 아니라 바로 “시간”이었다. 


단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 리허설은 허용되지 않는 인생인데, 나를 구성하는 이 의식은 생이 끝나면 되돌아올 수 없는데, 금전적 안락감이나 그럴듯한 명함을 위해 믿지도 않는 일, 재미도 없는 일을 하며 24시간 대기조로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 할 수 없겠다고 마음이 먹어졌다. 


더구나 막연한 회의감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와는 달랐다. 하고 싶은 일이 수십, 수백 가지가 생긴 터였으니까. 그래서 결국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있다. 


직업과 나를 분리하지 않고 온전한 나로서 공부하고 일하고 놀기 위해, 삶과 분리되지 않은 일과 공부와 놀이를 누리기 위해.








새로운 길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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