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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협상

내가 과거에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나는 언제나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의미나 가치, 목적에 대해서는 씁쓸한 입맛을 떨쳐내기 어렵지만, 그 일들이 다른 어떤 곳에서도 배우기 어려운 여러 능력을 내게 선사해줬다는 생각 때문이다.(의미나 가치, 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던 때에는 일 자체가 재미있는 구석도 많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여러 능력 중 가장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협상의 능력이다. 그렇다고 뭐, 내가 대단한 협상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나는 사실 정가표 붙지 않은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걸 꺼릴 만큼, 흥정에 능하지 않다.)  다만, 소소한 것부터 중요한 것까지 수많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봤던 건 흔한 경험은 아닐 터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런 테이블의 경험에서 배운 것은 

(1) "내가(우리 회사가) 반드시 얻어가야 하는 것"과 "내가(우리 회사가)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규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2) "단체로서의 상대 측이 아니라, 상대 측을 대표하여 협상 테이블에 앉은 자연인"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이 중요한 이유는, 

성공한 협상은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포기하고 내가 얻어가야 하는 것을 얻은 협상이기 때문이다. 단지 상대보다 더 많이 얻고자 하는 협상은 협상이 아니라 싸움일 뿐. 


(2)가 중요한 것도  어쩌면 비슷한 맥락이다. 

협상이 끝나고 악수를 하고 웃으며 돌아서려면, 마주 보고 앉은 우리가 사람임을, 입밖에 꺼내 말하고 있는 사안들이 각 자연인 자신의 요구가 아님을 늘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협상에 사적인 감정이 섞여들지 않는다. 무언갈 얻었을 때 어줍잖은 승리감에 도취되지도, 무언갈 내주었을 때 마치 내가 내준 양 우쭐거리지도 않게 된다. 상대가 많은 것을 원한다고 분노하지도 않게 된다. 사실 돌이켜 보면, 협상 테이블에서 감정에 휩싸이고 만 적이 없지 않았다. "비이성적인" 요구를 하는 상대에게 화가 나고, 그럼 상대쪽에 앉은 사람이 "멍청하거나" "이기적이거나" "말이 도통 통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상대에게 나는 "지나치게 깐깐하고" "현실은 모르고 논리만 내세우는" 사람처럼 보일 거라는 사실에 아파하기도 했다. 


협상 테이블의 나는 내가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것뿐임을(그리고 상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깨닫고 나서야, 나는 나의 개인적인 감정을 그 일에서 분리해낼 수 있었다. 때로 분노를 연기하고, 충분히 이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대사를 주워 삼겼지만, 상대에 대한 평정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협상이 끝난 후, "우리 둘 다 욕봤네요"라고 인사를 나누며 악수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내게 더 중요한 것은 매 협상의 결과가 아니라, 인생에 걸쳐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느냐라고 되뇌이는 것은 늘 도움이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저 두 가지가 협상이 아니라 내 인생 구석구석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원칙이 아닌가 싶다.

결정 앞에서 나는 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과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이 두 가지를 생각하면, 대부분의 소소한 고난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아직까지는 그랬다. 어쩌면 진짜 큰 고난은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는 행운 덕이었을지 모른다.)

사람에게 화가 나거나 미움이 깃들 때, 나는 상대가 놓인 맥락을 상상해 본다. 지금 그가 맡은 역할 모자를 잠시 벗겨놓고, 그라는 자연인이 놓여 있을 맥락을. 그러면 대개의 경우, 인간에 대한 미움이나 분노는 사그라들었다.( 이 역시, 내가 정말 징한 경우를 만난 적이 없어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 분에 넘치게 누렸던 것은 금전적 보상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부끄럽기도 자랑스럽기도 한 지난 시간의 경험들에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감사해야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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