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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각들

나에게 일어난 일

오른쪽 눈이 잘 보이지 않기 시작한지 딱 1주일째다. 날짜를 세어 1주일이라고 적는데, 생경하다. 나로서는 한 달쯤은 지난 것 같은 기분이다. 


처음에는 뿌옇게 촛점이 잘 맞지 않는 정도의 느낌이었는데, 뭔가 고장이 났다고 확신했을 때는 중심부 시야 일부가 뭉게진 듯 거의 보이지 않았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아침 강릉의 안과를 찾았더니 하루라도 빨리 큰 병원을 가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무시무시한 경고를 늘어놓으며 진료의뢰서를 써주었다. 그날 오후로 서울 큰 병원을 찾았다. 그로부터 며칠에 걸쳐 각종 눈 검사에 급기야 뇌 MRI까지 찍었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 뇌 MRI를 찍고나선 공포가 엄습해 죽을 병만 아니면 감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의사 친구를 둔 덕에 설 연휴 내내 공포에 질려 있지는 않아도 되었다. 내 뇌만큼은 분명히 깨끗하다고 했다.


적어도 죽을 병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일단 안도하긴 했지만, 검사 족족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가 기쁜 소식은 아니다. 여전히 오른쪽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인데다, 문제가 뭔지 모른다는 건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나름대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다. 과연 내 몸 속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미궁에 빠진 기분이긴 하지만, 살다보면 원래 그렇게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언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니까. 어쩌면 눈은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어쩌면 갑작스레 씻은 듯이 나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 주에 다시 병원에 갔을 때 무언가 답이 나와주기를 간절히 바라긴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앞에 거대한 모습으로 닥친 이 불확실성이 좀 무겁긴 하지만, 원래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그냥 이 상태의 삶을 일단은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아무튼 지금은 왼쪽 눈으로 볼 수 있으니, 불편하다 해도 대부분의 일상은 비슷하게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다. 


종합병원이 늘 그렇듯, 지난 며칠간 아주 많은 시간을 병원 복도에서 "기다리며" 보냈다. 눈이 편칠 않으니 책을 읽을 수 없었고, 결국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일이 별로 없었다. 때로는 뜬금없고 맥락없고, 때로는 유치하고 사소하고, 때로는 부질없이 극적인 생각들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느닷없이 영문도 모른 채 체포된,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K 같구나, 했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은데 그 일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는 면에서. 그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비슷한 일상을 꾸려갈 수 있다는 면에서. 그리고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렇게 뜬금없고 사소하고 부질없는 생각들을 늘어놓고 있다는 면에서. 


독자는 K를 쉽게 비웃거나, 조금 너그럽다면 그저 이해하기 어렵다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K의 자리에 놓인다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실감했다. 카프카는 참 대단한 작가구나, 하는 역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했다.



혹시 이 글을 통해 내 눈 소식을 알게 되는 지인이 있다면, 너무 걱정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상상해본 최악의 경우는 죽는 거였는데, 적어도 지금 상황으로선 그럴 일은 아닌 것 같으니 일단은 그걸로 됐고, 당분간은 불확실한 상황을 별일 아닌 듯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책을 마음껏 읽기 어렵다는 건 애석하지만, 뭐 그 정도쯤이야. 


나는 원래 시력이 나쁜 사람이었고, 감각이라는 건 원래 불완전한 것 아니겠나. "완전하게" 보인다는 건 원래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니, 지금의 "이전보다 조금 더 불완전한" 시각은 사실 따지고 보면 별일이 아니다. 물론 다시 "이전 정도만큼의 불완전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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