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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각들

지난 금요일의 단상

지난 금요일, 직장을 그만두고 처음으로 전직과 직접 연장선상에 있는 일을 했다. 두 시간 남짓의 강의였다. 강의를 준비하는 대략 1주일쯤, 사실 강의자료를 만들고 검토하는 것보다는 멍하니 앉아 지난 2년여간 거의 완전히 잊고 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내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냈다. 떠올리려고 했던 것은 강의를 위한 지식, 혹은 테크닉과 노하우 같은 것들이었는데, 기억 속에 함께 따라나온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골몰했던 문제들, 내가 좋아했던 것들과 싫어했던 것들, 내가 잘했던 것들과 못했던 것들, 내가 지녔던 일상의 리듬들까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아마도 내가 강의해야하는 지식이란 게 10년의 일 속에서 나도 모르게 얻어진 것들이었던 지라 내 몸이 뚫고 지나갔던 시간들과 그 앎을 따로 떼어낼 수는 없었던 게 아닐지.


강의는 아주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사람들 앞에서 할 이야기를 준비할 때,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내가 청중에게 어떤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을지, 그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청중과 나 사이를 오가게 할 수 있을지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아마도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지녔던 그 비슷한 자리들 중 가장 좋은 에너지의 흐름이 생겨났던 강의였던 것 같다. 거기에는 물론 청중이 이미 좋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나만을 놓고 보자면 내가 강의의 주제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던 듯하다.


그 자유로움이란 두 가지에서 오는데, 하나는 "내가 이 주제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확신이고,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하나는 그 주제에 대한 거리감이었다. 전자에서 오는 자유로움에 대한 감각은 어떤 신체적 감각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다. 내가 제일 잘하는 운동이 스키니까 많은 일을 스키에 비유하곤 하는데, 여기서도 스키를 비유로 들 수 있겠다. 스키에 충분히 능숙하지 못하던 때는 생전 처음인 스키장, 그것도 캐나다나 오스트리아 같은 곳의 큰 스키장 슬로프에 오를 때면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날이 좀 흐려 시야가 좋지 못하면 더욱 그랬다. 미지의 것에 잘 대처할 수 있겠는가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며 스키가 늘고,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에서든 내 스키를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이 생기자 그런 두려움이 사라졌다. 알지 못하는 어떤 상황이 닥처도 그것에 대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주는 자유로움, 그것은 나의 존재를 보호할 능력이 내게 있다는 단단한 감각이다. 금요일의 강의 주제가 그랬다. 거진 10년을 자의였건 타의였건 매일 같이 하던 일이었으니, 아마도 내가 스키에 대해 갖는 통제력보다 족히 수십 배의 통제력을 갖는 일이 아닐까. 그러니 누가 무엇을 묻건, 나는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이니, 그 자체로 순수하게 즐거운 감각이다. 그러고보니 더 나이 들기 전에 그렇게 자신에 대한 단단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일들이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소망이 생긴다. 그러기 위해선 사실 다른 비결은 없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이는 것, 그게 글쓰기든 요리든, 달리기든 그림 그리기든 무엇이든 간에.


후자, 그러니까 그 주제에 대한 거리감에서 오는 자유로움은 동일시에서 벗어났을 때에서야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곧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여겼다면, 아마도 나는 지난 금요일의 강의에서처럼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에 몸 담았던 시절, 어쩌면 지금보다 훨씬 더 생생한 앎을 갖고 있던 시절에 내 일에 대해 말하는 게 오히려 그닥 편치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어쩌면 더 이상 자신을 "업계에 몸 담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게 되었기에 가능했던지는 몰라도, 이제서야 내가 거쳤던 경험에 대해 특별한 의미부여나 포장 없이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직장을 떠나면서 프로페셔널로서의 가면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가 사라졌다는 것 역시 한몫을 해주었겠지만.


그런데 사실 거리감이 준 가장 좋은 선물은 강연하는 데 느꼈던 자유로움이 아니었다. 바로 내 일의 의미를 큰, 그리고 다른 맥락 안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었다. 그 일을 나 자신으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던 때에는 보이지 않던, 그 일이 놓인 여러 맥락, 그 맥락들의 교차가 이제서야, 어쩌면 무슨 소용일까 싶은 지금에서야 내 눈 앞에 드러났다. 한때는 내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착각했고, 그러다가 또 어떤 때는 내가 하는 일이 너무도 무의미하고 비루하고, 심지어 부끄러운 건 아닐까 싶은 생각에 괴로웠더랬다. 그런데 이제서야 그 일이 내 눈 앞에 다른 모든 일과 그리 다르지 않을 만큼의 의미와 무게가 어떤 과장이나 비하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나에게 너무 가까운 것에 대해서 그저 담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들 안에서 나를 떼어내 바라보는 데 미숙하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 그렇듯, 늘 그것을 지나치게 포장하거나 지나치게 낮추어보기 마련이다. 그러나 맥락 안에 놓인 일을 바라보려면, 그리하여 그 일이 지닌 여러 층위와 의미를 다면적으로 이해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리이다. 일 안에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를 보는 것, 그럴 때 실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온전히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자기"로부터 놓여나는만큼 어른이 된다고 믿는다. 한때는 그 무엇보다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 보다 정확히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지에 전전긍긍했다. 그러다가는 일이 잘 되게 하는 데 목을 매달았다.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일이 중요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실 일이 곧 나, 일의 성과가 곧 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일이 놓인 맥락이, 그 안에 교차하는, 나 자신을 포함하는 수많은 사람의 이해와 욕망이 그리고 삶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언제고 한결같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 같은 것은 없음을, 그저 그 안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내는 것뿐임을 생각하려 애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내일 좀 더 어른이 되어 있기를, 그리하여 좀 더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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