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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대체가능한 인력, 대체불가능한 사람

한때 휴가를 떠나는 동료와 주고받곤 하던 대화.


"일 걱정은 하지 말고 잘 놀다 와. 너 없어도 일 잘 돌아가니까."


농반진반으로 하는 대꾸 --- "그럴까봐 걱정이지."



* * *


"재미있는 건, 대기업에 가서 깨달은 게 역설적으로 ‘시스템이 없다’ 는 것이었어요. 자세히 살펴보니, 조직 내에서 조직의 역사와 경험치를 고스란히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로 인해 문제가 고스란히 해결되는 특징을 갖고 있더라구요. 문제가 발생하면 “그 생산계 아무개가 그 부분은 잘 알아. 가서 물어봐. 이리 오라고 해봐” 하는 식으로 연륜있는 내부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거죠."


얼마 전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 주간 뉴스레터에 실린 기사에서 눈에 들어왔던 구절이다.(http://blog.makehope.org/smallbiz/1036, 이 구절 말고도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저런 '내부 전문가'가 되는 것, 대개의 직장인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대체불가능한 인력이 되는 것, 그리하여 나 없이는 일이 안 돌아간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그제야 우리는 "휴가 다녀오면 내 자리가 사라지고 없을" 악몽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대체 불가능한 인력으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나 없이는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에겐 '언제고 일 앞에 나를 가져다 놓아야 할' 의무가 생긴다. 나 하나 때문에 일이 안 되는 상황을 허락해주는 직장이 있겠는가. 바쁜 게 훈장인 세상이긴 하지만, 휴가를 떠나서도 핸드폰 벨은 울려대고, 전화 한 통 놓치면 마음이 조마조마한 상황이 즐겁기만 할 리 만무하다.



* * *


여기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내가 몇 차례 블로그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책,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이야기(Bread and Butter)'. 그레이트하비스트사의 창업주 로라와 피트 부부는 매해 한 달 정도의 긴 휴가를 떠난다. 그런 긴 휴가는 그들에겐 '지속가능한 일'을 위한 필요조건이었고, 그 필요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 그들은 '대체가능한 인력'이 되어야 했다. 로라와 피트의 선택은 다른 모든 자본주의의 기업이 그리 했듯,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기업이 노동자를 대체가능하게 만들어 손쉽게 버리고 손쉽게 채용하는 '자유'를 누리고자 시스템을 만든다면, 이들은 창업주인 자신을 대체가능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자신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려 했다. 그리고 창업주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만큼 직원 모두가 자유를 누리길 원했다. 보통의 기업이 시스템을 통해 좇는 자유가 자본의 자유라면, 그레이트 하비스트가 원했던 자유는 사람의 자유였던 셈이다.


그러나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유가 모두에게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상황"은 자유를 의미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나의 쓸모 없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짤릴' 위험이 없다고 모두가 만사 OK인 건 아니다. 대체불가능한 인력이 된다는 건, 1차적으로는 일자리의 안정성을 담보해주는 조건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자신을 가치 있고 중요한 존재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는 조건이기도 하다. 


시스템은 잘 돌아가면 갈수록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회사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


"시스템, 시스템. 우리가 여디서 늘 듣는 소리는 그것뿐이야. 그 목적이란 것은 로라와 피트가 떠나 있는 동안 원숭이라도 훈련만 받으면 회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 아니겠어?" _78~79쪽


이 점은 그레이트 하비스트사에서도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중요한 사람 셋을 잃고야 말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레이트하비스트사는 시스템을 놓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즐겁게 일하지만, 일이 삶을 잡아먹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던 로라와 피트에게 시스템이 주는 자유는 양보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 * *


시스템이 사람에게 자유를 선사하면서도 효능감은 앗아가지 않으려면, 하나 하나의 우리가 인력horsepower으로서는 대체가능하나, 사람character으로서는 대체가능하지 않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라는 것이 다른 누군가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어야 한다.


시스템 덕에 자유로워짐으로써 시스템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포착할 줄 아는 것, 그리하여 사업의 지평, 공동체의 지평을 넓혀내는 것. 그 지점에서만이 시스템의 진짜 필요가, 동시에 사람의 대체 불가능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시스템이 주는 자유를 두려움 없이 누릴 때만이 우리는 지루하고 반복적인 과업task에서 놓여나, 인력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기획 전체project를 바라볼 역량을 허락받는다. 인력이 대체가능할 때, 비로소 사람은 대체불가능해지는 아이러니다.


나는 내가 없는 동안에도 나의 프로젝트가 잘 돌아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돌아가는 방식이 '다르기'를 기대한다. 내가 있으나 없으나 똑같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하는 동료가 나를 아쉬워 해주기를 바란다. 일에서의 시스템이라는 게 꼭 워크차트나 체크리스트 같은 것만은 아닌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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