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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생각들

우연히 생기는 열정

아침에 책을 하나 뒤적뒤적거리다가 첫 직장 M사의 인터뷰가 문득 떠올랐다. 그곳의 인터뷰는 1:1 인터뷰 2회로 이루어지는 한 라운드가 세 번 반복된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인터뷰는 다섯 번째의 1:1 인터뷰였다. 이미 이전 인터뷰에 대한 평가기록을 손에 들고 있던 인터뷰어는 "problem solving(문제 해결)은 됐고..."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 뒤, 이런저런 일반적인 면접용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회사가 사람을 뽑을 때 보는 주된 측면은 problem solving과 personal impact. 또 하나가 있었는데, 리더십이었던가.


Personal impact에서는, 무언가 매력 있는 인간으로 보이느냐, 사람을 끌어들이고 신뢰감을 주는 presence가 있느냐, 이런 걸 묻는다. 좀 속되게 표현하자면, 말빨과 분위기로 먹어주느냐, 이런 거겠지. 낯 가리는 성격이라는 걸 숨기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 뭔가 꼬박꼬박 논리적인 대답은 잘하는데, 애가 에너지 레벨도 낮아 보이고 소심해 보이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이른바 "열정"이란 게 있는지를 체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인터뷰어는 팔짱 턱 끼고 까칠한 말투로 여러 가지를 묻다가 "왜 컨설팅을 하려고 해요?"라는 질문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하면 참 나이브한 인간이었다, 나. 

그 "왜"라는 질문이 어떤 목적이나 가치 같은 걸 물었던 걸 텐데, 나는 저 질문을 "어쩌다 컨설팅을 하려고 해요?"라고 받아들였던가. 아니 사실은 그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으므로, 솔직히 대답하려면.


나는 구구절절이 어떤 계기로 컨설팅을 알게 되어 매료되었고, 그러다 이런 소리를 들어서 어쨌고, 어쩌구 저쩌구 그래서 이리저리하였습니다, 라고 순진하게 늘어놓았다. 그리고 돌아온 대답은

"뭐 들어보니 전부 우연히 그렇게 되었던 건데, 컨설팅에 대한 진지한 열정이 정말 있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건 전형적인 '압박 인터뷰'용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발끈했다.

"진지한 열정이야 우연한 계기로도 생길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나는 저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이, 라고 진심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진심으로 화가 났었다.

인터뷰어는 "뭐, 인생관이 다른 걸 수도 있겠네."라고 반응하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어쩌면 처음으로 목소리가 높아지며 빠지직하는 모습이 오히려 플러스였는지 모르겠다. 나는 인터뷰 내내 목소리가 작았고 기죽어 있었다. 나를 호의적으로 봐주었던 첫번째 인터뷰어는 다음 인터뷰부턴 더 크게 말하라고, 자신이 충분히 똑똑하다는 걸 믿으라고, 그렇게 조언해줄 정도였으니까. 

약 팔러 다니는 데 능한 요즘의 나를 아는 이들이라면 믿지 않을 모습일 것이다. 아무튼, 화가 난 덕에 난 나의 에너지 레벨을 보여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도 두 번의 인터뷰를 더 치른 후(여섯 번째 인터뷰를 마치고도 의견이 모이지 않아, 나는 일곱 번째 인터뷰까지 봐야 했다) 결국 나는 그 회사에 입사했다. 나는 아직도 그 회사에서 내 커리어를 시작했던 것이 내 인생을 크게 바꾸었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곱 번의 인터뷰를 거쳐 그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내 인생에 다른 많은 일에서 그러하듯, 참 운이 좋았다.


저게 무려 13년 전의 일이다. 나는 생각이 참 많이 변해왔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지금 지닌 가치관의 상당 부분은 어쩌면 나의 타고난 기질인지 모르겠다. 그때에도 나는 진심으로 "진지한 열정이야 우연한 계기로도 생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달라진 것이라고는, 이제 나는 "진지한 열정은 우연한 계기로'만' 생기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아마 지금 똑같은 인터뷰 질문을 받는다면, 저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인터뷰라는 게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자리라기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답해야 하는 자리라는 걸 지금은 아니까. 하지만 "왜"라는 질문은 언제나 "어쩌다"일 수밖에 없다고, 그때 본능적으로 알았다면 지금은 머리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처음의 마음, 나의 뜻과 신념, 같은 말은 별로 믿지 않는다. 끝까지 지켜내야만 하는 가치나 목표 같은 게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에너지를 쏟는 모든 일은 우연히 내게 왔고, 나는 그 우연들에 감사하므로. 그렇게 우연히 이 일들이 나를 떠난다 해도, 그래서 내가 다른 일들에 또 에너지를 쏟아 넣고 있다고 해도, 지금 내가 겪어내는 모든 경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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