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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내리막 세상의 기본소득

일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말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는지? 돈 버는 직장인이나 사업가라면야 고민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학생이라면? 전업주부라면? 은퇴 후에 자원봉사로 바쁜 장년층이라면? 왜 이들은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걸까?


얼마 전 책을 한 권 세상에 내놓았다.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내리막 노마드”) 라는 긴 제목이 달린 책이다. 이 책에서 나는 일을 하고 싶지만 일만 하며 살고 싶지는 않은 우리의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더구나 먹고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마저 때로 구하기 힘든 '내리막 세상‘이라면, 우리에겐 어떤 새로운 ’일‘하기의 모델이 가능할지 모색해보고 싶었다. 


커다란 파도에 몸을 싣고 꾸준히 “보통”만 하면, “남들만큼” 살 수 있던 오르막 세상은 아마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그 오르막 세상에서 작동하던 일의 정의, 일의 윤리를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리막 노마드》 책 속 구절이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자마니와 브루니는 현대사회가 골머리를 썪고 있는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자리 활동(job activity)"의 개념과 그보다 훨씬 큰 ‘일(work activity)’의 개념을 나누어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업이라는 용어는 일자리 활동의 범주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두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탈산업화 사회는 ‘일’에 대한 수요가 충족되지 않은 채 넘쳐나는데도, 동시에 일자리 부족, 즉 실업의 문제로 고통 받는다. 풀어 쓰자면, 일자리 활동, 즉 돈벌이 노동의 수요는 줄어 실업률은 점점 높아지지만, ‘일’ 자체의 수요는 줄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다는 것이다. 일자리 활동이 아닌 일에는 우리가 이른바 잉여짓이라고 칭하는 각종 문화 활동이나 이른바 ‘관계재(relational goods)’를 생산하는 사회적 돌봄 활동이 포함될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장애인 및 소수자 계층을 돌보는 활동에 일손은 언제나 부족하다. 다만 이런 활동은 일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일자리 활동은 되지 못할 뿐이다. 1차 산업혁명 이전에 일과 일자리 활동은 같은 것이었다. 일한다는 것은 일자리를 갖는다는 뜻이었고, 그 역도 성립했다. 공장 생산 체제가 탄생하면서, 일자리는 사회적인 것으로 재탄생했다. 자기 혼자 일한다고 일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것이 더 이상은 아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제 한 사람의 일자리란 대량 생산 시스템 내에서의 좌표를 가리키게 되었다.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가지려면 자본에 ‘고용’되어야 한다.

산업화 초기에는 일자리에 노동자를 채워넣는 것이 관건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사람들은 고용되지 않고도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일하며 살아왔다. 산업자본은 그런 사람들을 고용된 일자리에서 일하도록 유인하지 못해 골머리를 썩었다. 탈산업화 시대에 접어든 지금, 상황은 역전되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자본은 예전만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브루니와 자마니는 산업시대에나 탈산업시대에나 일자리와 일의 경계가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자면 위험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일’을 고용 중심으로 규정하는 산업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일’의 규정을 고용 시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활동까지 아우를 수 있을 만큼 넓히지 않는다면,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할 것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지점이다.”


그렇다면 그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내리막 노마드》에서는 이 지점에서 멈췄지만, 실은 못 다한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현재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능한 단 하나의 해답은 '기본소득'이다. 자의로 태어난 사람은 단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모든 태어난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것이 복지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장기간의 저성장이 명약관화한 이 시대, 설사 성장세가 나아지더라도 고용 없는 성장일 게 불 보듯 뻔한 이 시대, 자마니와 브루니의 말을 다시 빌리자면,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자면 위험한 거짓말”이다. 나는, 기본소득이 아닌 다른 무엇도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안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고정관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모두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주는 데 드는 어마어마한 재원은 어떻게 마련하는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나는 정치인이나 정책 전문가가 아니라, 한 명의 자연인이자 시민으로서 말하고 싶다. 나는 기본소득을 ‘원한다.’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두에게 생존을 보장해주는 세상을 ‘원한다.’ 그리고 모두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그런 세상을 ‘원하는지’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정치인이나 정책 설계자의 시선으로 보기 전에, 이 내리막 세상을 사는 개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가능성과 방법은 그 다음의 문제가 아닐는지.


내가 기본소득을 원하는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물론 나는 돈을 벌지 못할 때 최소한의 안정을 바란다. 그러나 그 뿐만은 아니다. 나는 마음껏 일을 사랑하며 열정을 다해 일하고 싶다. 이게 누군가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것이며, 남의 몫을 빼앗아 밥을 굶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걱정은 하고 싶지 않다. 내 일의 포트폴리오에서 밥벌이만을 위한 일의 양을 더 줄일 수 있기를 바란다. 밥벌이의 무게로 불의를 눙치고 넘어가는 일은 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덕에 ‘일하는’ 이로서 더 당당하고 정의로워질 수 있을 것이고 믿는다.





일은 곧 돈벌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일은 얼마나 빈곤한가. 그리고 그렇게 빈곤해진 일에 최소한 하루의 여덟 시간을 쏟아넣어야 하는 삶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가. 그런 일자리조차 얻지 못할까 불안감에 전전긍긍해야 한다면 그건 삶이 아니라 버티기가 아닌가.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오늘의 이 내리막 세상이, 이미, 그러하다.


기본소득이 현실이 된 사회는 전업주부의 일을, 학생의 일을, 은퇴노인의 일을 모두 ‘일’이라고 명명해준다. 이 모든 것이 일자리 활동은 아닐지언정,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고 그를 통해 사람들과 관계 맺는 오롯한 ‘일’이 아닌지.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 ‘일’에 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를 치를 누군가를 찾을 수 없다면, 각각의 존재로 위안 받으며 사는 서로가 그러하면 되지 않겠나. 그리고 그 “서로”를 대변하는 주체가 사회요 국가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일을 통해 돈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것들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그 덕에 각자의 일을 각자가 정의할 수 있게 하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에서 오롯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며, 놀듯이 일하고 일하듯이 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그 사회에서 지금보다 더 많이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사회와 기본소득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린다.



*)

이 글은 [new BI 칼럼 / 시대정신 기본소득]에 기고되었습니다.

http://newsbikr.wordpress.com/2014/12/17/column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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