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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책임'의 달콤함

니세코의 히라후라는 작은 마을에서 5일을 머물렀다가 돌아왔다. 히라후에서는 어디서나 커다란 요테이 산이 보인다. 밋밋하다면 밋밋한 홋카이도의 시골인데, 압도적인 요테이 산의 존재가 각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편의점에 터덜터덜 걸어가다가도, 노천탕에서 온천을 즐기다가도, 고개를 들면 요테이 산이 보인다. 어떤 날은 산봉우리 아래 구름이 걸려 아름답다. 또 어떤 날은 쨍하게 파란 하늘 아래 눈 쌓인 요테이 산이 만들어내는 대비가 근사하다.


요테이 산이 어디를 가나 따라다녔던 것처럼, 히라후의 5일 동안 내 마음을 계속 따라다녔던 건 '책임'이라는 단어였다.


히라후에서 본 요테이 산



'책임'이라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릴 때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마지막 직장에서 곧 회사를 그만두리라 마음 먹고선, 그저 그게 '언제'여야 할지만을 선택으로 남겨두고 있던 때의 일이다. 당시 일하고 있던 투자 건의 상대방측 임원은 정말 말할 수 없는 진상이었다. 노골적으로 접대를 요구하고, 원하는 수준의 접대를 받지 못하자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여자인 나에겐 명백히 성희롱이랄 수 있는 발언을 하기 일쑤였다. 모욕적 언사가 도를 넘어선다 싶었던 하루,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던 마음을 참게 했던 것, 그것이 바로 '책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가 느낀 책임은, 프로페셔널로서의 책임도, 회사에 대한 책임도, 일에 대한 책임도 아닌, 순전히 나와 함께 일하고 있던 내 동료들에 대한 책임이었다. 나는 그들이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것이 온전히 나의 일이기만 하다면, 나는 진즉, 백번도 넘게 욕지거리를 해주고 그 자리를 떠났겠지만, 그 일은 나의 일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일이었고, 어쩌면 곧 떠날 마음이었떤 나에게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할 일이었다. 내 밥그릇을 차는 데 주저함이 있을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곧 그만둘 마음이었고, 그 회사뿐 아니라 그 업계를 떠날 생각이었으니. 그렇지만 내 밥그릇은 홀로 서 있지가 않았다. 내 밥그릇을 차는 순간, 함께 날아가버릴지 모를 그들의 밥그릇을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때 욕지거리를 참았던 게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판단이 서지 않는다. 어떤 관점에선 불의 앞에 눈을 감은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어떻게 다르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회사를 떠나면서는 '내키지 않는 무언가를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책임'을 최소화하면서 살고 싶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신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의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완벽하게 그럴 수야 없겠지만, 최대한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가능하면 혼자 하는 일을 하려 했고, 계약한 만큼의 일을 계약한 시간까지 하면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말은 거짓말일지 모른다. 혼자 하는 일을 하려 했고, 책임을 최소화하고 싶었다고 하기엔, 나는 롤링다이스를 시작했고, 계속해서 세미나를 조직했다. 나에게 '책임'이란 너무 달콤하고도 강력한 기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일으킨 동기가 사그라들 때, 나를 강제하고 끝까지 그 길 위에 버티게 해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힘이 언제나 유효하게 작동하는 방식이 내게는 '책임'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 자발적 동기는 믿지 못하되, 책임감은 믿었고, 그래서 무언가를 끝끝내 해내기 위해 책임을 떠안는 방식을 취했다.


물론 그 방식은 타협적이었다. 롤링다이스를 일종의 취미 또는 부업 공동체로 기획한 것도, 그리고 언제나 정해진 텍스트로 단락 지어지는 형식으로 세미나를 진행한 것도, 책임의 범위를 명확히 하려는 방어본능이었을 것이다. '책임'을 활용하되, 그것이 내 온 일상을 짓누르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던 모양이라고, 돌이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진상질을 일삼는 상대를 두고도 끝끝내 자리를 박차고는 나올 수 없을 정도의 책임까지는 나아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랄까.


어디에서도 눈에 들어오던 요테이 산을 보며 '책임'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 건, 아마 요즘 들어 책임의 범위를 조금 더 늘려볼 마음이 먹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 꽤 운 좋은 일이라는 생각도 비로소 들었기 때문이다. '책임'이라는 말과 함께 떠올릴 수 있는 얼굴들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어떤 책의 제목처럼 모두 "별이 남긴 먼지"일 뿐인 인간이 삶에 의미라는 것을 부여할 수 있는 이유는 - 설혹 그게 자기위안에 불과할지라도- 자발적으로 떠맡은 '책임' 때문은 아닐까. 


책임으로만 이뤄진 삶은 결코 원하지 않지만, 아무 책임도 질 필요 없는 삶은 더 끔찍한 것 같기도 하다. 어디를 가도 따라다니는 '책임'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나도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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