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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잠 못 들던 밤들

무심한 마음으로 읽어내려가다가 다음 구절에서 숨을 훅 들여마셔야 했다.


아파트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조용하다. 회계사가 템스 강변에서는 IT사와 회의를 하고, 인턴사원 앞에서 정실을 죽이느라고 안간힘을 쓰는 동안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 오늘 같은 하루를 어떻게 마감해야 할까? 그것은 까다로운 문제다. 사무실에서 이루어진 상호작용 때문에 그의 정신은 태염이 감겨 집중도가 한 눈금은 올라갔다. 그런데 이곳은 정적과 전자레인지의 맞추지 않은 시계에서 나오는 불빛뿐이다. 그의 반사 신경을 가혹하게 테스트하는 컴퓨터 게임을 하다 갑자기 벽에서 플러그를 뽑아버린 느낌이다. 짜증이 나고 불안하다. 그러나 동시에 곧 부서질 듯 피로하다. 도저히 무슨 의미 있는 일을 할 기분이 아니다. 책을 읽는 것은 물론 불가능하다. 진지한 책이란 시간을 요구할 뿐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싸고 형성될 연상과 불안이 펼쳐질 수 있도록 감정적으로 깨끗한 잔디를 깔아놓을 것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래도 인생에서 한 가지만 잘할 팔자인 것 같다.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중에.


과거의 무수했던 밤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팽팽히 "태엽이 감겨" 있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태엽을 다시 느슨히 풀지 못해 영 잠들 수가 없었던 밤들. 낮 동안의 아드레날린 러시탓에 계속해서 심장은 분당 10번씩 정도는 더 빨리 뛰고 있는 느낌이었다. 참다 참다 화장실에 뛰어갔다 오고, 회의에 회의가 꼬리를 물고 통화에 통화가 꼬리를 물고, 공중으로 종이 위로 떠다니는 수많은 정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테나를 바짝 세워야 했던 하루. 그런 하루가 끝나고 빈 집으로 돌아오면, 아침에 남겨두고 간 허물들이 꼼짝 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쁜 하루의 일과는 나름 짜릿했다. 아드레날린이 치솟고, 난무하는 정보를 가지런히 정리해 구조화하고, 그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고, 일이 돌아가도록 자원들을 정렬하는 일은 짜릿했다. 나는 분명 그런 일들을 좋아했다. 그러나 정말 "오늘 같은 하루를 어떻게 마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쩐지 허무했고, 어쩐지 외로웠고, 어쩐지 맥이 탁 풀린 듯했던 밤들이었다. "갑자기 벽에서 플러그를 뽑아버린 느낌", 바로 정확히 그런 느낌이 엄습했다. 무언가 나를 돌보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마음의 여백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던 시간들. 내일 아침 다시 태엽을 팽팽히 감으려면, 어서 잠들어야 한다는 강박에 더욱 잠들기 어려웠던 시간들.


위의 구절을 읽자 그 시간들의 무게가 엄습해 왔다. 나는 그 시절을 후회하지 않는다. 실은 좋았었다고 생각하는 면이 훨씬 많지만, 저 구절이 상기시킨 그 밤들의 기억만은 그리 상쾌하지가 않다. 낮의 색조와는 무척 달랐던 밤의 빛깔.


지금도 가끔은 낮 동안 감긴 태엽을 푸는 게 영 쉽지 않은 밤들이 있다. 하루 종일 바짝 당겨진 긴장을 내려놓을 수 없어 잠들 수 없는 밤들이. 그렇지만 요즘엔 대개 묘한 흥분감이 함께 해서 좋다. 기꺼이 잠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침대에 누워 쌩뚱맹뚱 천장을 바라보며 하루를 복기하는 일이 즐겁다. 요즘 난 내 일을 즐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일의 기쁨과 슬픔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12-02-29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일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생명력이다 인생의 절반을 즐겁게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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