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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돈 안 쓰고 노는 게 능력

최근 일본 고등학생 35만 명에게 물은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미래에 대단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으며 ‘경쟁해서 출세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각주:1] 후지무라 야스유키는 이런 ‘평화공생지향’ 젊은이들이 1990년대 후반 대거 시골로 이주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시골에서 그 대단하지도 않은 기대를 채울 만큼의 돈벌이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도시로 돌아와 울며 겨자 먹기로 경쟁의 대열에 다시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야스유키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에 ‘3만엔 비즈니스’라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3만엔 비즈니스란 말 그대로, 한 달에 3만엔을 벌 수 있는 사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엔 몇 가지 조건이 따르는데, 첫째는 한 달에 이틀 이상을 일해서는 안 되고, 둘째는 경쟁을 유발하지 않는 ‘착한’ 사업이어야 한다. 만일 3만엔이 부족하다 싶으면, 3만엔 비즈니스를 여러 개 하면 된다. 그러나 하나의 3만엔 비즈니스에서는 3만엔 이상을 벌어서는 안 된다는 게 기본 전제다. 야스유키가 생각하는 독신 젊은이의 적절한 소득액은 9만엔이다. 따라서 3만엔 비즈니스를 세 가지하면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3만엔 비즈니스는 한 아이템에 이틀 이상 일해서는 안 되므로 9만엔을 벌려면 한 달에 엿새만 일하면 되는 셈이다.(이틀 일하고 3만엔 버는 게 가능한지는 접어두자. 여기서의 논점은 그게 아니므로. 구체적인 사업 아이템이 궁금하신 분은 《3만엔 비즈니스,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를 참고하시길.) 자 이제, 남은 24일을 채울 당신의 욕구가 무엇인지가 문제다. 그 욕구에 드는 돈이 얼마인가가 3만엔 비즈니스 삶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한다. 돈은 ‘착하게’ 버는데 소비 욕구는 ‘착하지’ 않다면, 9만엔이 ‘적절한 소득액’이 되어줄 리 만무하다.


홍대 인근에 둥지를 튼 ‘문화로놀이짱’이란 사회적기업이 있다. 폐목재를 재활용하여 가구를 만드는 공방인 동시에 손으로 하는 노동이 깃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리는 시민학교다. 2006년 안연정 대표는 나눠 쓰고 공유하는 시장을 만들고자 홍대 부근에 작은 공동마켓을 열었고, 그곳에서 알음알음 알던 재주꾼들과 뭉쳐 2010년 문화로놀이짱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문화예술 기획자였던 안연정 대표는 우연한 계기로 손노동의 기쁨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얻은 새로운 감각이 삶의 소비구조를 달라지게 했다고 말한다.


“(원하는 물건을 시장에서 살 수 없으니) 그럼 직접 만들어볼까 생각하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엄청난 무아지경에 빠졌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을 쓰지 않고 있구나, 총량을 쓸 때 만족감이란 이런 거구나, 몸 노동이 주는 엄청난 몰입의 기쁨이 있구나, 하는 환기가 있었다. 몰입의 기쁨과 만들어보는 경험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문제해결력이 생긴다. 주변의 물건들이 어떻게 조립되었는지 관심을 갖게 되고, 집안에서 생긴 작은 문제들도 스스로 해결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러다보면 내가 화폐를 교환하면서 사는 삶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형광등을 갈고, 문을 고치고, 이렇게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생기다보면, 내 삶의 규모가 어느 정도만 되도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주변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있고, 자꾸 모이다 보면, 술집 가서 10만원 내고 술 먹는 것 보다 내 집에 친구들 초대해서 음식 만들어 먹고, 친구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들 같이 배워 가방 같은 것 직접 만들어 쓰는 게 훨씬 재밌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갖고 싶은 걸 만들 수 있기도 하고. 그러다보면 내 집도 직접 카페처럼 꾸미고 싶단 생각도 들고. 이런 식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모든 게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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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작업을 하면서부터 몸의 감각이 깨어나고, 그러다보면 일상에서 찰나 같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여유와 시각이 생기는 것 같다. ‘인간으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것들과 생성시키고 개발할 수 있는 감각이 이렇게 많았구나’를 알게 되면서, 세상의 시선이나 구조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돈의 양, 경제적 형편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자존감이 생겨났다.”[각주:2]


돈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욕구를 줄이는 만큼 돈벌이의 무게를 덜 수 있다. 안연정 대표가 말하는 삶에서는 많은 욕구가 돈 없이, 혹은 매우 적은 돈으로 해결된다. 어쩌면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경제적 능력’의 확대가 아닐까? 경제 활동이 화폐를 버는 활동과 처음부터 같은 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경제economy라는 말은 그리스어 오에코노미아oekonomia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에코노미아는 ‘가정oikos’과 ‘질서nomos’가 합해진 말로, 원래의 뜻은 ‘집안 살림’이었다. 최초의 경제학자로 불리곤 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집안 살림을 꾸린다는 의미의 오에코노미아와 재물을 획득하는 기술을 명확히 구분했다. 오에코노미아는 ‘돈 버는 일’로 간단히 환원되지 않는다. 홍기빈은 이 개념을 빌려와 ‘돈벌이 경제’와 구분되는 ‘살림살이 경제’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돈벌이 경제가 말 그대로 화폐로 환산되는 경제 활동만을 포함한다면, 살림살이 경제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정신적 ․ 물질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유형 ․ 무형의 수단을 조달하는 행위” 전체를 아우른다.[각주:3] 경제가 곧 돈벌이 경제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쓰는 사람이 커다란 경제적 능력을 가진 셈이다. 그렇지만 1시간 동안 돈을 10만원 벌면서 즐거운 사람과 1시간 동안 20만원을 벌고 똑같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20만원을 써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양쪽은 똑같은 즐거움을 누렸지만, 전자에겐 10만원이 남았고 후자에겐 한 푼도 남지 않았다.(이 역시 여전히 매우 ‘화폐적’ 계산법이기는 하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직접 만들고 뚝딱뚝딱 스스로 집을 꾸미는 일은 GDP에 잡히지 않는 ‘비’경제적 활동이다.  하지만 살림살이 경제의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경제적인 활동이며 동시에 아주 ‘효율적’이기도 하다. 1만원을 들여 샀어야 할 물건을 직접 만들어 1만원을 아낀데다가, 추가로 2만원은 들여야 누릴 즐거움을 누린 셈이다. 안연정 대표가 말하는 손작업이 돈 버는 일인지 아닌지야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명실상부한 살림살이 경제활동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삶에서는 소비 활동과 생산 활동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소비와 생산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는 살림살이 활동이 늘어나는 것은 탈산업사회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해법이기도 하다. 3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은 현저히 높아졌고, 사회 전체를 놓고 볼 때 엄청난 시간이 생산 공정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산업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도 환경은 그 시간을 ‘자유’가 아니라 ‘실업’으로 바꿔놓았다. 산업사회가 정의하는 “생산 활동”만을 일로 규정하고 그 나머지를 모두 소비 활동으로 담아낸다면, 수많은 사람이 불가피하게 실업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일자리를 두고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일자리를 차지한 이는 지키기 위해 고달프고, 차지하지 못한 이는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사회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우리에겐 새로운 ‘일’의 정의가 필요하다. 새로운 ‘일’의 정의는 새로운 ‘소비’의 정의를 가져오고, 결국 새로운 방식의 삶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안연정 대표가 겪었다는 삶의 변화가 보통 사람은 엄두내지 못할 어려운 시도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모두에게 손작업만이 정답이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돈 많이 벌고 돈 많이 쓰는 삶보다 돈 들이지 않고 놀고 살 수 있는 능력을 조금씩 기르는 것, 더 나아가 돈 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관계망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럴 때만이 ‘돈벌이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의 굴레에서 벗어나 비로소 일을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쯤엔 소득과 소비의 셈법을 좀 잊고 살아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1. 후지무라 야스유키 저, 김유익 역, 《3만엔 비즈니스, 적게 일하고 더 행복하기》, 북센스, 211쪽 [본문으로]
  2. 팟캐스트〈공존공생〉 시즌2, 제6화 “손노동으로 만든 세상” [본문으로]
  3. 홍기빈 저, 《살림/살이 경제를 위하여》, 60쪽, 2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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