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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 대한 생각

온전히 내 것인 욕망은 없다

누구든 부모님의 기대, 남들의 시선, 세상의 잣대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중요한 인생의 결정을 해야 하는 순간, 남의 눈에 비치는 나, 사회적 잣대로서의 성공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남들의 시선이 내가 생각하는 나의 행복보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남들의 시선이 나의 생각보다 때로는 더 명백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나의 꿈,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궁이지만, 남들의 ‘통상적’인 시선이라는 것,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이라는 것은 참 명확하기 그지없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그래서 그저 쉬운 길을 택했던 건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이 부러워할 법한 것은 뚜렷이 잘 보였고, 목표를 세운 다음에야 그게 무엇이든 계획을 세워 열심히 해내는 것만은 내 특기였으니까요.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이 실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늘 그것을 가지고 나서야만 알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단한 금욕과 구도를 한 건 아닐지 몰라도, 온 20대를 쏟아 목표로 했던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만, 행복하긴커녕 하루하루 무미건조한 일상이 남았을 뿐이라면? 더 이상 그다지 고생일 것도 없는, 극복해야 할 장벽이 없는 현실이 하나도 달갑지 않게 느껴진다면? 이건 내가 ‘진짜’ 원했던 게 아니었어, 나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구나, 라는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30대에 접어들고 얼마 안 지나서의 일입니다.


뒤늦게야 지나온 시간의 흔적에서 나의, 온전히 '나의 꿈'이랄 만한 것을 찾아보려 애를 써봤습니다만, 답은 예전에도 그랬듯 당연히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이제야 돌이켜 중학교 때의 꿈이 그랬으니 나는 여전히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대학 시절 이래 꾸준히 공을 들인 취미라고는 스키밖에 없으니 스키강사가 되는 건 어떨까. 도대체 내 꿈이 무엇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해지지 않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것,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 돈을 잘 버는 것 같은 일이 좋다고 생각할 땐 복잡할 게 하나도 없어 보였는데 말이죠. 그렇게 쉽고 명확한 듯 보이는 것만 따라온 나에게 이제 남들이 부러워한다는 것은 이제 위로는커녕, 오히려 스스로 조소할 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많은 사람이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큼 유명한 라캉Jacques Lacan(1901~1981)의 말입니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낸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입니다. 위의 말을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아이는 주체로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타자, 즉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존재,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존재가 되려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때 어머니는 최초의 가치 판단자요, 아이에게는 욕망의 준거가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성장하며 어머니에서 아버지, 그리고 세계의 상징적 질서로까지 타자의 범위를 확장해 나가는 동안에도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상태로 남습니다. 결국 부모, 학교, 대중매체, 언어 등과 같이 광범위한 의미에서 사회에 의해 주입된 이상을 자신의 욕망 삼아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죠[각주:1].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무의식의 층위에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내가 의식적으로 “그래, 지금부터 엄마가 바라는 걸 충족시킬 테야”라고 마음먹는 식으로 상황이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야 마음을 그 반대로 고쳐먹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일 텐데 말입니다.





이제껏 뭘 보며 달렸나, 후회에 사로잡혔던 나에게 라캉의 유명한 이 말이 새삼스레 날아와 가슴에 꽂혔고, 이제껏 남들이 좋다는 것만 쫓느라 나 자신의 욕망은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에 마음이 쓰렸습니다. 그리하여 라캉을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있던 것이라고는 딱 저 한 마디였는데, 그 뒤에 무슨 생각이 숨어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라캉을 읽다 보면, 내 진짜 욕망이 무엇인지 찾을 방법, 타자의 욕망이란 것에서 자유로워질 방법을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요.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라캉은 내가 가졌던 질문들을 하나도 충족시켜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많은 철학자가 그랬듯이, 애초의 질문을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새로운 지평에서 다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게 라캉이 의도했던 지점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 * *


여기 갓 태어난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이 아이는 지금 막 세상에 도래한 것일까요? 실제의 세상에 대해서라면 그렇지만, 상징의 질서, 언어의 체계 안에서 아이는 출생 이전부터 존재합니다.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 심지어는 임신하기 전부터 부모는 아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아이의 ‘이름’을 지어 보기도 합니다. 상징의 질서 속 아이의 자리는 아이의 출생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타자는 욕망을 주입하는 타자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세계 속에서 아이가 물리적인 존재를 획득하게 되는 원인은 부모의 욕망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욕망은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도 아이에게 계속해서 작용합니다. 아이에게 자신을 최초로 보호해주는 타자, 즉 어머니는 당연히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이의 생존을 책임지는 어머니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아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지를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더 많은 사랑과 돌봄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발로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어머니라는 타자의 욕망을 헤아려보려고 할 때, 이미 맞출 수 없는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쏘고 있는 셈입니다. 어머니의 욕망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읽어내야만 합니다. 어머니의 몸짓과 표정에서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요구를 가늠하려 애씁니다. 부모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말한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습니다. 말 자체가 근본적으로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밥상머리에서 “시금치를 먹어야 착한 아이지”라고 말할 때,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시금치를 잘 먹는 아이”가 아닙니다. 무엇이든 골고루 잘 먹는 아이겠지요. 어머니의 마음에 드는 “착한 아이”가 되고 싶은 아이는 꺼리던 시금치를 한 번 두 번 입에 넣다가 결국 시금치에 입맛을 들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어머니는 시금치 농사에 농약을 너무 많이 쓴다는 뉴스를 듣기라도 하면 아무렇지 않게 말을 바꿔 “시금치는 먹지 마!”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이 즈음에 이르면, 과연 시금치를 좋아하는 아이의 욕망은(이런 것도 굳이 욕망이라 부를 수 있다면) 과연 아이의 ‘진짜’ 욕망일까요, 아니면 어머니의 욕망인 걸까요.


아마도 어머니의 욕망을 제 욕망으로 삼는 것은 아이의 본능적 생존기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같은 무의식의 생존기제란 아이가 성장한다고 사라져버리지 않습니다. 사회라는 상징의 질서 안에 편입되고 나면, 그 생존기제는 사회가 부여하는 욕망을 욕망하는 식으로 진화하겠지요. 이제 상황은 더 복잡질 수도 있습니다. 타자는 더 이상 어머니라는 한 개인에 그치지 않습니다. 복수의 타자가 주입하는 욕망이란 더욱 모호하고 때로 수없이 상충하여 현실의 인간이란 도저히 모두 채울 수 없는 무언가이기 십상이죠. 세상은 치열하고 성실한 이의 성공을 부러워하면서, 한편으로는 놀 줄도 알고 낭만도 아는 베짱이의 매력에 찬사를 보내기도 합니다. 독립적이고 똑 부러지는 커리어우먼은 좋지만, 드세고 목소리 큰 여자에게는 눈살을 찌푸리죠. 월화수목금금금 기꺼이 일하여 거둔 성공에 뿌듯하다가도, 다음 순간 나의 꿈 같은 건 돌보지 않고 살아온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집니다. 징징거리는 건 딱 질색이고 남자 앞에서 약한 모습 보이기는 싫지만, 한편으론 독한 여자, 드센 여자라는 말을 들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쏟아지는 욕망들에 이리저리 휩쓸리다 보면, 평정과 고요는 간 곳 없고 마음은 늘 요동칩니다.


타자의 욕망에 집착하며 그것만이 모든 선택과 행동의 원인이라면 신경증자라고 합니다. 신경증자는 타자의 욕망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때, 가장 큰 괴로움을 겪습니다. 타자의 모호한 말이, 알 수 없는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을 때, 신경증자는 혼란에 빠집니다. 차라리 명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주기를 바라지만, 앞서 말했듯이 말이라고 100%의 명확함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죠[각주:2]. 반대로, 자신이 한 일과 타자의 소망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강조하며, 타자의 소망에 반하여 살아가는 데 집착한다면 강박증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삶이 자생적인 것이라고, 자신은 온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하겠지만, 그 역시 타자의 욕망에 휘둘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신경증자가 왼쪽으로 움직일 때, 강박증자는 오른쪽으로 움직인다는 게 다를 뿐입니다[각주:3]


객관적 시선이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에게 점수를 매길 때, 하나가 채워지면 비어 있는 다른 하나가 보여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 그럴 때 내게도 신경증자의 모습이 있겠구나 싶더군요. 직장일 처음 시작했던 즈음, 상사가 잘한다 못한다 어느 쪽이든 시원하게 얘기 좀 해줬으면 싶던 마음도 신경증이었을까요. 사람들과 왁자하게 떠들고 온 밤이면,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재수 없게 보이진 않았을까 걱정하는 것도 일면 신경증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신경증이 다가 아닙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성공”의 척도를 쫓으며 살아왔던 걸 조소하며, 이제 “나만의” 욕망을 찾아보겠다고 마음먹는 데서 강박증자의 모습이 보인다면 비약만은 아닐 겁니다. 이제껏 나를 이끌어온 욕망들을 검열하며, 그 안에서 타자에게서 온 조각을 찾아내 그로부터 도망치려 애쓰는 데선 분명 강박증의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신경증도 강박증도 아닌 상태로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오롯이 자유로워지는 게 가능한 일일까요? 내 마음자리에 몰아치는 갖가지 욕망을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무인도에 떨어져 주변에 단 한 명 없어도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건 몇이나 남을까요? 그래도 책 읽는 것 하나만은 여전히 좋아할 거야, 싶다가 책 많이 읽는 딸내미를 뿌듯해하던 어머니의 칭찬이 파블로프의 종소리처럼 내 몸에 새겨졌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지금은 날씨가 으슬으슬 추워지기만 하면 스키 탈 생각에 가슴이 두근댈 만큼 스키를 좋아하지만, 처음에는 남자친구가 좋아하는 걸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시작했으니 그 역시 오롯이 내게서 온 욕망이라고 하기엔 깔끔치 않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닿은 곳은 ‘진짜’ 나의 욕망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욕망은 언제나 나의 것도, 타자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타자의 개입 없이 오롯이 선 단독자란 존재하지 않듯이, 내 안의 욕망에서 진짜 나의 것과 타자의 것을 발라낸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흄은 ‘나’라는 주체가 시간을 거슬러 동일하게 유지되는 자명한 실체가 아니라고 말했었죠, 그렇다면 ‘나’라는 것은 하나의 장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곳에서는 수많은 타자와 수많은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여러 욕망이 일어나기도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 욕망을 누구의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욕망에는 인칭이 없습니다.


“주체와 인칭을 결코 미리 자명한 실체로 간주하지 않고(흄), 다양한 관계와 촉발 속에서 진동하는 미립자의 확대와 교착으로 간주한다면(스피노자), 욕망은 나와 당신과 그/그녀의 욕망이기 전에 복잡한 동적 편성 속에 있고 비주체적, 비인칭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욕망은 무리와 미립자 사이에 있고, 본질적으로 무리와 미립자의 욕망인 것이다.”[각주:4]


불평할 것 없는 직장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것은 이곳에 오도록 나를 이끈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삶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욕망이 움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떠날 것을 결심하지 못하는 것 역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게 나의 욕망이든 타자의 욕망이든, 아직 이곳에 욕망이란 녀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인 거죠. 다른 무언가를 원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나는 근사한 명함, 좋은 사무실, 두툼한 월급봉투 역시 놓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단지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 새로운 욕망은 아직 형태를 갖추지도, 충분히 강하지도 못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욕망은 “찾아야 하는 나의 진짜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새로운 관계와 사건들 안에서 스스로 형태를 갖추며 “발생할” 욕망이었습니다.


현실적인 욕망이든, 낭만적인 욕망이든, 이타적인 욕망이든, 이 욕망들 사이에는 어떤 위계질서도 없습니다. 욕망 자체는 번민을 낳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떠오르고 가라앉는 욕망들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데서, 그 욕망들에 점수를 매기는 데서 옵니다.


  1. 브루스 핑크 지음, 맹정현 옮김,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68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103쪽 [본문으로]
  3. 같은 책, 232쪽 [본문으로]
  4. 우노 구니이치 지음, 김동선 · 이정우 옮김, 『들뢰즈, 유동의 철학』, 그린비, 15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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