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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거나 옮기거나 만든 책 이야기

[옮긴이 후기]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


시민경제로 내리막 세상의 낙관을 읽다



출판사에서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의 원서를 보여주며 “이 책을 출간하면 어떻겠냐”를 물어왔을 때, 내 대답은 이랬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제가 번역해보고 싶은 책이네요.” 작은 협동조합을 꾸려 새로운 일터의 모델을 고민하는 사람인 나에게 이 책은 그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간편한 대답을 지나치게 실용적으로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랬다. 이 책은 요즘 들어 부상하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과 같은 경제조직의 근간에 있는 원칙들을 ‘시민경제’라는 이름으로 아우르면서, 이런 경제조직들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 놓이고 어떤 원칙 아래 작동해야 하는지 짚어준다. 그리하여 내가 협동조합을 한다는 것, 즉 경제 활동 속에서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려 한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명징하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러나 솔직히 털어놓자면,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는 친절한 책이 아니다. 첫 문단만으로 이미 눈치 챈 독자도 있겠지만, 간편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친절한 책이기는 어렵다. 이 책이 불친절하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런데, 첫째, 분야를 특정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서두에는 경제사(史)를 논하는 책인가 싶다가, 어느 순간 철학서나 인류학서로 보이다가, 뒤쪽으로 가면 비영리조직을 위한 경영서인 듯도 하다가, 끝 부분에 이르면 정책을 다루는 책처럼 읽힌다. 한 마디로 여러 얼굴을 가졌는데, 그런 만큼 아우르는 지식의 폭과 양이 방대하다. 

이 책이 불친절한 두 번째 이유는 두 저자가 펼치는 논의가 모든 측면에서 낯설다는 것이다. 우선은 이 책이 제시하는 ‘시민경제’라는 프레임 자체가 그렇다. 경제적 합리성을 만사의 보편타당한 잣대로 휘두르는 주류 경제학과 거리를 두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요즘 급부상하고 있는 ‘사회적 경제’의 언어와조차 거리를 둔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종류의 이분법, 이를테면 시장과 사회를 가르는 구도, 경제적 거래와 이타적 증여의 대비, 영리기업과 비영리기구의 구분을 모두 뛰어넘으며, 기존의 경제문법을 끊임없이 의심해보도록 이끈다. 책을 읽어가는 내내, 자연스레 두 발 딛고 서 있던 지평이 흔들거리는 기분을 떨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불친절함이야말로 이 책이 가진 가장 탁월한 미덕일 것이다. 한 권으로 족히 책 서너 권어치의 충족감을 준다는 장점(번역자의 입장에서는 이것을 장점으로 꼽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끝없이 기존의 전제를 되짚음으로써 시야를 넓혀준다는 장점은 모두 이런 불친절함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불친절함을 덜어 보고자, 책을 가장 먼저 꼼꼼히 읽은 독자로서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를 읽어내는 세 가지 독법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종횡무진 이 분야 저 분야를 넘나드는 책이니만큼 각자가 나름의 관점에서 책을 읽을 수 있겠지만, 더 많은 독자가 이 책의 불친절한 탁월함과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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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쓴 경제사


첫 번째 독법은 경제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좇아가는 방식이다. 경제사를 다루는 대개의 책이 그 출발점을 애덤 스미스에 둔다면,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출발해 중세 이탈리아의 수도원 문화에서 시민경제의 원형을 찾는다. 그렇게 긴 역사를 지나 경제‘과학’이 발현하는 근대에 도달했을 때, 애덤 스미스 옆에 나란히 놓이는 것은 이탈리아의 시민경제학자 제노베시다. 애덤 스미스를 시조로 삼는 주류 경제학이 ‘보이지 않는 손’이 조율하는 경제를 그렸다면, 제노베시가 그리는 경제 체제에서는 시민 덕성의 ‘보이는 손’이 경제활동을 조율한다. 제노베시 역시 “부유해지고자 애쓰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만을 좇을지라도, 그 덕에 온 국가가 부유해짐으로써 공익에 이바지한다”고 말하며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공공 행복을 실현하려면, 시민 덕성의 ‘보이는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본문 125쪽) 애덤 스미스가 자유주의 경제학의 시조라면, 제노베시는 시민경제학의 시조다. 이 둘의 흥미로운 교차를 마주하노라면, 역사는 승리한 자가 해석하는 서사라는 말이 경제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는 명제가 하나 있는데, 경제학적 관점에는 언제나 인류학적 전제가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들 알다시피, 자유주의 경제학이 전제하는 인류관은 ‘호모 오이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다. 인간을 ‘합리적’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원자화된 개인으로 보는 것이다.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는 호모 오이코노미쿠스의 기원을 “[인간의] 사회성을 비본질적이고 일시적이며 우연한 것”(81쪽)으로 보았던 근대철학에서 찾는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이며 공포와 필요 때문에 사회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근대 철학의 인류학적 관점이 마키아벨리에서 홉스를 지나 맨더빌로 이르기까지 어떻게 발전했으며, 어떤 식으로 경제학과 만나게 되었는지 파헤친다. 

그에 반해 두 저자가 되살리려하는 시민경제의 전통은 인간을 ‘호모 레시푸로칸스(상호적 인간)’로 본다. 그리고 호모 레시푸로칸스는 시민경제의 주체인 ‘시민’ 그 자체를 가리킨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인류학적 관점을 따라가다 보면, 기실 애덤 스미스는 시민경제학 쪽에 꽤나 가깝게 다가가 있는 학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 해도, 그 본성 안에는 명백히 몇몇 원칙이 있다. 그 원칙들에 따라 사람은 다른 이의 행운에 관심을 기울이며, 다른 이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149쪽)라고 쓰기도 했다. 동시에 시장을 재화의 거래만이 아니라 “시민적이고 인간적인 발전을 위한 장소”로 보았으며, 상업사회는 봉건사회와 달리 “평등을 바탕으로 자유로이 우정을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148쪽)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은 이렇게 인본주의적 바탕위에 놓여 있었다. 다만, 애덤 스미스가 경제의 목표를 국부의 증대에 두었다면, 제노베시는 공공의 행복에 두었을 뿐이다. 시민경제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던 당시에는 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을지 모른다. 

 


시민경제 조직의 경영원리


두 번째 독법은 비영리기구나 제3부문, 사회적 경제 조직 등을 포괄하는 이른바 ‘시민경제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특히 유효할 방식으로, 시민경제 주체에 대한 논의를 따라가며 시민경제 조직의 경영 원리를 고민해보는 것이다. 시민경제 조직에 적합한 경영 원리는 시민경제 조직의 목적과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두 발 딛고 선 시민경제학의 전통은 시장을 그 자체로 사회 ‘안’에 있는 것으로 본다. 인간의 사회성과 상호성은 시장에서 활동할 때에도 여전히 작동해야 한다. 시장 안에서 오롯이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인간이 시장을 벗어나는 순간, 갑작스레 상호성을 품은 시민으로 둔갑할 수는 없다. 더구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언제 시장 속에 있고 언제 사회 속에 있는가? 그 둘을 구분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한가? 시민경제학은 개개인의 이익추구와 상호성의 작동이 경제 활동 안에서 아무런 문제없이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상호성의 원칙에 따라 경제 행위를 하는 주체들을 시민경제 조직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들 조직의 성과는 마찬가지로 그 같은 원칙에 따라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브루니와 자마니는 이 책에서 상호성을 (1) 무조건적 조건부, (2) 양도의 양방향성, (3) 사역성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규정하며 시민경제 조직을 위한 운영원리의 철학적 기반을 놓는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요약하자면, 일반 영리기업의 역할은 등가교환의 원칙에 따라 거래되는 사유재의 생산이고, 시민경제 조직의 역할은 상호성의 원칙에 따라 순환하는 관계재의 생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리기업과 대비시키는 부정형의negative 방식으로 시민경제 조직을 규정하면서(‘비’영리기구NPO, ‘제3’섹터조직, ‘비’정부기구NGO 등처럼), 동시에 영리기업을 경영하는 방식을 시민경제 조직에 적용하려는 시도들이 얼마나 심각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특히 6장의 후반부에서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이분법 아래, 둘의 틈새를 채우는 조직으로 비영리조직을 규정하는 전통적 이론이 결국은 자가당착적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탈산업사회의 일과 복지


세 번째 독법은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가 부딪힌 난점을 돌파하기 위한 해결책을 모색해보는 독법이다. 이 책은 우리 시대가 부딪힌 두 가지 근본적 난점, 바로 실업과 복지의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시민경제의 시각을 되살려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산업화된 경제 체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일과 소비를 나누어 생각하며 살아간다.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며, 동시에 이 책의 두 저자가 강도 높게 비판하는 공리주의적 프레임에 따르자면, 일은 타인의 효용을 높이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이며, 소비는 돈을 지불하고 나의 효용을 높이는 행위다. 그러나 이런 도식에는 함정이 하나 있는데, 이때의 ‘일’이 실은 일work activity이 아니라 일자리 활동job activity이라는 것이다. ‘일’은 대량 생산 체제 안에서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일자리 활동’보다 훨씬 큰 개념이라고 두 저자는 말한다. 포드주의 시대에나 통용되던 일자리 활동과 일의 동일시를 오늘날의 포스트-포드주의 시대에까지 고집한다면, 수많은 나라가 부딪히고 있는 실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브루니와 자마니의 생각이다. ‘일자리 활동’만이 ‘일’이라고 여겨질 때, 관계재 창출에 들어가는 노력은 ‘일’로서 대우받지 못한다. 관계재는 경제적 효용으로 단순히 환산될 수 없지만, 사회 안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재화다. 더구나 탈산업사회는 탈-일자리dejobbing 현상, 즉 고정된 일자리가 점점 소멸해가는 현상(220쪽)을 낳는다. 결과적으로 ‘일’에 대한 수요는 넘치는 데, ‘일자리’는 부족한 딜레마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284쪽)

두 저자는 생산성의 증가로 인해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인력을 소비 증가로 창출되는 일자리가 흡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자면 위험한 거짓말”(285쪽)이라고까지 일갈한다. 민간 부문에서 ‘해방된’ 노동력이 사적 시장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재화, 즉 관계재와 가치재를 생산하는 일로 흘러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어야 한다는 게 자마니와 브루니의 생각이다. 

우리가 맞닥뜨린 것은 일자리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져가는 시대다. 일자리 없는 소수에게 혜택을 베풀어 다시 일자리를 얻도록 돕는다는 식의 전통적 복지 정책이 제대로 작동할리 만무하다. 고용 시장에서 잠시 이탈한 자를 시장 밖에서 연대를 통해 돕는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시장과 연대는 서로 복잡하게 얽혀”(222쪽) 있으며, 더욱 그래야 한다. 시장이라는 기구 자체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목적을 위해서 활용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이 책은 ‘사회적 품질 시장social quality market’이라는, 사회적 서비스가 거래되는 새로운 시장 기구를 제안한다.

이 세 번째 독법을 따라 이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성장이냐 분배냐를 묻는 프레임으로는 우리가 부딪힌 경제적 ․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부는 증가하지만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경제성장이 더 이상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않으며, 그 경제성장조차 점점 속도를 잃고 있는 현실에서 경제와 사회, 노동과 복지를 바라보는 시민경제학의 새로운 관점이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게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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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내리막 세상’이라고 부르곤 한다.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한 우리나라는 마찬가지로 빠르게 저성장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내리막 전망을 많은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온 나라가 우울증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러나 이 ‘내리막 세상’이 반드시 행복의 감소로 이어지리란 법은 없지 않을까. 이 책을 번역하는 동안, 고대부터 오늘날의 탈산업화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민경제가 겪어온 흥망성쇠를 뒤좇았고, 동시에 새로운 시민사회의 부흥, 새로운 복지 모델의 등장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 덕에 나는 이 내리막 세상이 ‘개인’의 ‘부’를 위해 희생되었던 ‘시민-들’의 ‘행복’을 되살릴 기회를 가져다줄지도 모르겠다는 낙관을 감히 품어보았다. 이 조심스러운 낙관을 많은 독자와 나눌 수 있다면 큰 기쁨이겠다.